「국제신문발행인연맹」26차 총회가 제기한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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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유롭고 책임성 있는 신문이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제도적인 전제를 이룬다는 것은 되풀이하기조차 쑥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실제 오늘날 민주사회의 신문들은 그들이 걸머진 이런 엄청난 의무를 옳게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의 민주적 기틀 보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세계신문발행인 자신들이 던진 대답은 신문과, 나아가서는 한 사회의 민주적 기틀의 보지라는 문제와 관련해 적지 않은 주목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최근 「오스트리아」수도 「빈」에서 열린 FIEJ(국제신문발행인연맹) 제26차 총회가 얻은 한가지 결론은 신문이 이와 같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체의 사회적 기능의 재평가가 불가피한 과제로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부연한다면 그저 「뉴스」나 정보의 전달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실의 판단자이며 해석자(Interpreter)로서의 신문의 기능이 다시 확인되고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수탈자 될 위험도>
그 이유는 소위 정치 사회나 정보매개 수단의 「매스」화, 즉 대중화라는 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대중을 『알아야할 사실로부터 격리 내지는 고립시키는』 경계할만한 증상을 보여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FIEJ총회의 의장이자 「빈」의 「클라이네·차이룽」지의 발행인인 「한스·사스만」(한·오 협회회장)박사가 그의 보고에서 제기한 이와 같은 문제는 그저 신문계에 한정된 것이기보다는 소위 대중사회의 한 어두운 단면을 파헤친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논란될 소지를 갖는다해도 괜찮다.
최근 흔히 운위돼온 정보전달수단의 전자화, 정치의 대중화가 실제로 정보면에선 사실의 모호화, 정치에선 대중의 무능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주장은 이런 두 가지 조류가 다같이 필요한 지식의 보급자(Supplier)가 되기보다는 수탈자가 될 위험성을 생리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우선 「매스컴」의 전자화를 대표하는 「텔리비젼」의 경우만 보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우려를 갖게 할만한 측면은 찾기에 어렵지 않다.
「텔레비젼」의 엄청난 보급이 소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뉴스의 홍수, 소화 못해>
그리고 전달 수단의 동시성(Instantness)이라는 것이 지구 어느 구석, 아니 달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까지도 거의 즉각적으로 우리들 안방구석에까지 알려다준다.
그러나 이런 정보공급의 대량성이나 신속성이 가져다주는 보다 두드러진 결과는 정보의 홍수현상이라는 것이다. 홍수라는 표현 그 자체가 시사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현상은 시청자로 하여금 이렇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하고, 소화하고 하나의 줄거리나 의미 있는 「이미지」를 형성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긴 「텔리비젼」으로서는 어떤 현상의 체계 있는 파악을 돕기 위한 시도를 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청중을 끌어 묶어놔야 한다는 상업적 또는 경제적 필요로 인해 그러한 노력은 극히 제한되거나 피상적인 것이 되기 일쑤다.

<정치의 대중화 논란거리>
결국 전자「매스컴」 수단을 통한 「인스턴스」정보의 희소현상을 결과하게 된다는 말이다.
전자 「매스컴」을 통한 이른바 『대중의 백치화』라는 것은 「텔리비젼」에 대한 실없은 핀잔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진실의 일면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스」사회 속에서의 정치의 대중화라는 경우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은 벌써부터 언론계·학계 등에서 논란거리가 되어온 터다. 논의의 골자만 간추려보더라도 「매스컴」의 현대적 기능은 재평가돼야 한다는 사실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정치적 결정과정의 대중적 참여의 폭이 넓어지고 민주적 정권이나 노력의 초점을 단순한 투표결과에 집중케 해왔다. 그리고 대표를 위한 효과적이며 보편화된 수단으로 택해져 온게 모든 사물의 극단적인 단순화다.
이에 따라 정치적 설득은 보다 상징적인 「슬로건」에 가까운 양식을 띠게 되고 그것이 노리는 효과는 『선전 「포스터」적』인 것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국가의 운영이 기구적으로 방대해지고 내용적으로 기술화·재문화되어 온 근대적 경향은 일반국민들로 하여금 알아야 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 추구하려는 의욕이나 능력을 좌절케 해옴으로써 국민들은 일정의 정치적 무관심이나 방관에 안일한 피난처를 찾게 되어 왔다는게 이들이 보는 현대적 위기상황의 한 측면이다. 이와 같은 경향이 만일 고질화된다면 그것이 치자·피치자간의 대화를 전제한 민주 정치의 바탕을 좀먹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FIEJ「빈」회의에 참가한 각국신문인들이 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큰 이유의 하나는 이러한 도전이라는게 민주화과정이 보다 후퇴된 총통사회나 소위 발전도상 국가들에서 보다는 오히려 선진공업사회에서 한결 선명하게 부각되어 왔거나 될 가능성을 나타내왔다는데 있다.
그것은 신문에 대한, 또는 언론자유에 대한 도전은 전제적인 정치권력으로부터 보다는 대중사회의 내재적 요인으로부터 보다 심각히 던져지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더 적극적 기능 개척을>
이에 대한 회답이나 상면과제로서 제기돼온게 신문의 기능에 대한 재평가라는 문제다.
그리고 그런 재평가의 한 반영으로 제시돼온 것이 그저 정부의 단순한 반영자나 전달자로서보다는 사실의 해설자·해석자라는데 신문은 그의 적극적인 기능을 발견하고 개척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신문들이 이러한 기능을 안해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사회의 현대적 상황은 지금까지의 신문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아주 만족치 못하다는 것이 많은 발행인들의 평가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입장에서 사실을 사실로서 해석을 해야하느냐?
공정한 해석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이나 공통의 언어라는게 있을 수 있는 것이냐?

<자유언론은 생리적 주권>
또 신문각자가 지닌 상업적·경제적인 상리를 이런 사회적인 요청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등.
이번 FIEJ총회가 어떤 소득을 얻었다기보다는 질문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확인된 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통용어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하여는 신문기능의 부단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이고, 또 그것은 민주언론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문계의 책임이며 사회 전체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월터·리프먼」이 말한 것처럼 『자유롭고 의미 있는 언론, 또는 신문이란 민주시민이 향유하는 특권이기보다는 민주사회가 그 생존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생리적인 주권』이기 때문이다. [빈=박중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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