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휴전회담(후반부)(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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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승만 대통령이 6·18 반공포로 석방 영단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혈서탄원, 송환반대「데모」, 밀사파견 등 반공포로 자신들의 열렬한 투쟁이 크게 작용했다.
석방의 첫 동기는 이같은 우익포로들의 필사적인 석방투쟁에서부터 비롯됐다.
6·25전쟁중 「유엔」군은 포로를 다루는데 있어 원점에서부터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고 이에 따라 여러 복잡한 문젯점이 생긴게 사실이었다.
정규 북한공산군이나 중공군을 포로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전혀 그 반대인 반공투사를 비롯한 피난길의 민간인과 심지어 고기를 잡으러 나온 어린 소년들까지 일률적으로 포로 수용소에 잡아넣음으로써 세계 사상 유례가 드문 6·25의 또 하나의 전쟁인 「포로전쟁」을 빚어내게 했다.
전선의 공산군 포로를 인계 받아 후송하는 「유엔」군 관계당국이 도중 도주자의 숫자를 채워 넣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과거 적지의 민간인들을 붙들어 들였던게 이러한 포로 아닌 「포로」가 생기게 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였다.

<민간·소년까지 잡혀 포로로>
물론 「유엔」군들이 언어와 감정이 잘 통하지 않아 신분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같은 포로관리는 결과적으로 수용소 사태를 오월동주격의 또 하나의 싸움터로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공산군 포로중의 송환반대자와 군인이 아닌데도 애매하게 붙들린 반공민간인들은 우선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뭉쳐서 공산포로들의 만행을 저지해야 했고 석방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익포로들은 수용소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평양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공산포로들과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정부·「유엔」군 사령부 등의 관계 요로에 석방을 탄원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의 뜻이 이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층에까지 충분히 전달되어 6·18거사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반공포로들은 51년8월 거제도 수용소에서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하기 전까지는 미군포로 관리당국에 근무하는 국군통역 장교의 도움을 받아 공산포로들의 가해를 저지하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 반공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면 수용소 안에서의 투쟁과 석방운동 전개 과정을 관계 당사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이관순씨(당시 수용소 내 대한반공청년단장·현 서울거주·상업·50) <나는 해방직후 조선민주당에 가입, 북한에서 반공투쟁을 전개하다가 6·25전쟁 중 미군한테 포로 아닌 포로가 됐읍니다.
「유엔」군이 잡은 공산군 포로 중에는 엉뚱하게도 이북에서 반공운동을 하던 우익인사들과 어린 소년들로부터 60세가 넘는 일반 민간인들도 상당히 끼여 있었어요.
우리 반공포로들은 공산포로와 일률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수용되던 그날부터 「유엔」군 당국의 포로관리에 대한 많은 맹점을 무릅쓰고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며 자유대한에 잔류하려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읍니다.
반공포로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펴 나가기 시작한 것은 50년11월 내가 부산 수영 제1포로수용소에서 미군전범 조사처의 통역장교 김선호 중위(현미 「미들테네시」주립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감찰대 부대장으로 활약하면서부터 입니다.

<김선호 중위, 반공포로 도와>
전범심사를 받는 도중 김중위가 나의 민주당원증을 보더니 절대 신임, 미군한데 얘기를 해서 감찰대원을 시켜줍디다.
당시 수용소 안의 자치를 위한 모든 포로 간부직은 거의 영어를 할 줄 아는 남한출신 의용군 포로들이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었어요.
나는 김중위의 도움을 받아 가며 곧 수용소 감찰대의 실권을 잡게 됐고 반공동지들을 규합키 시작했읍니다.
아마 당시 우익포로들에 대한 김중위의 애국적인 협력이 없었더라면 우리 반공포로들은 모두가 공산당한데 맞아 죽었거나 석방운동도 전개해 보지 못한 채 북으로 강제 송환돼 버리고 말았을거예요.
수영수용소에서부더 산발적으로 반공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우리 우익포로 1백20여명은 51년초 모두 거제도 제77, 제82 수용소로 이동했읍니다.
제77로 들어갔던 나와 20여명의 동지들은 제83수용소로 이동해서 공산포로들과 투쟁을 벌이다가 뭇매를 맞고 각 소대로 분산 당해 죽도록 노동을 했어요. 이렇게 돼서 우리들 반공투쟁의 싹이 짓밟혀 버리려는 찰나 김중위가 거제도로 건너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했더니 찾아왔데요. 그가 미군과 함께 와서 우리 83수용소를 시찰하는데 정말 구세주가 찾아온 것 같읍디다.
김 중위가 미군한테 얘기를 해서 공산포로 감찰대장을 즉각 내쫓고 나를 올려 앉혀 주더군요.
나는 점차적으로 공산포로 간부들을 모두 반공동지들로 교체시키고 한광호, 한병두(고인), 강응인(고인)동지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지들을 포섭, 반공포로 조직을 강화해 나갔고 제82수용소에도 연락을 취했더니 유지훈 감찰대장이 중심이 돼 활발히 움직입디다.>
▲한광호씨(당시 대한반공청년단서기장=현 서울거주·54) <나는 공산당한테 반동으로 몰려 3년형을 받고 평남신창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6·25전쟁 직전 형기를 만료하고 출옥, 평양 친척집에 숨어 있던 중 북진한 미군한테 포로가 됐읍니다. 인천을 거쳐 부산 거제리 수용소로 들어갔는데 포로 중에는 철없이 들판에 물고기를 잡으러 나왔다가 붙잡힌 17, 8세의 중학생도 있는 등 수용소 안의 사상과 성분이 아주 미묘한 양상을 띠고 있읍디다.
뿐만 아니라 포로들중 골수공산분자들은 벌써부터 주먹을 휘두르며 반공적인 포로들을 제압하려고 날뛰더군요.
나는 당시 거제리 수용소 포로여단의 부소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공산포로들의 설치는 꼴이 기어이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아 자위책을 모색, 우선 그들에게 대항할 반공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나영조 소대장을 통해 알게 된 이관순씨를 우선 우리 막사로 데려오고 강제용(고인), 고사부 동지 등 산재해 있는 반공기수들과 힘을 합해 공산포로들에 대항해 나갔읍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1·4후퇴가 시작될 무렵부터는 공산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킬 기세여서 이관순 동지와 나는 반공동지들을 더욱 많이 규합, 포로수용소 안의 반공전선을 견고히 구축해 나갔어요.
이같은 반공운동이 대동하는 중 우리포로들은 50년말 다시 부산 수영수용소로 이동, 김선호 중위를 만나게 돼 그의 도움으로 도로 자치조직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읍니다.

<동지규합, 공산포로와 투쟁>
얼간이 같은 공산군 대위출신 유영환 감찰대장을 「로버트」화 시키고 이동지가 부대장, 내가 사무장이 돼 골수 공산당원들을 잡아 족치기 시작했고 신윤섭·이승화·유지훈·이윤준·최용희 동지 등 반공투사 1백여명을 규합했어요.
거제도로 이동해서 제83수용소로 들어간 우리 20여명의 반공투사들은 동지포섭 공작을 계속, 이찬영·방예식·우용은(고인)·김병후·홍병구·김재묵·장위석·박두형·권몽준 등 22명을 규합한 후 공산군 중좌 출신인 주재욱 여단장과 공산당 검사출신 김원보 위생관을 숙청, 이관순 동지가 경비대장을 맡고 내가 위생관이 돼 악질적인 공산포로들을 속속 색출해 냈읍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제83수용소를 반공투쟁의 전략기지로 만드는데 성공했어요. 51년6월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거제도 수용소 안의 공산포로들은 지하에 숨겨 놨던 「용광로」라는 그들의 공산당 조직을 밖으로 노출시켜 폭동을 일삼고 매일 밤 반공포로를 무비하게 살상합디다.
특히 제76, 제77, 제78같은 적색수용소에서는 밤중에 인민재판을 열어 좌익포로들을 삽으로 쳐죽이는 등 만행을 자행했어요.
그러나 81, 82, 83, 73, 74등의 우익이 강한 수용소는 3월∼5월 동안에 포섭한 반공동지를 중심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이같은 6월∼7월의 공산폭동을 사전 방지하는데 성공했어요.
이 무렵 우리의 구원자인 김중위가 거제도로 건너오게 됐고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공산포로들의 「용광로」에 대항하는 대한반공청년단의 조직을 서둘렀읍니다.

<이 박사에 송환반대 탄원도>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유엔」당국과 한국정부 요로에 우리 반공포로들은 송환을 절대 거부한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한 탄원서를 보낼 준비를 했구요.>
▲김기식씨(당시 부산 거제리 수용소 포로=현 충남 논산군 양촌면 거주·59) <나는 1946년 평남 진남포에서 조만식 선생의 제자 안치중씨와 함께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암살 계획을 하다가 공산당한데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해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 50년10월16일 「유엔」군의 진격을 맞아 극적인 탈출을 했으나 미군헌병한테 포로가 되고 말았읍니다.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 그만 공산포로들한테 과거 반공활동을 한 것이 탄로돼 피살될 뻔했어요.
마침 수용소 감찰대원이던 고향친구 임우봉씨의 아들이 귀뜸을 해 주길래 그날 밤 다른 막사로 피해 버렸더니 내 자리에서 자던 사람이 대신 삽으로 찍혀 죽었읍디다. 거제도로 건너가서는 이찬영씨를 비롯한 반공동지들과 힘을 합쳐 끈질긴 투쟁 끝에 새빨갛던 제74수용소를 「백색」으로 전복시키는데 성공했읍니다.
우리 74수용소가 반공으로 되고 난 후 이승만 대통령이 비래, 이관순·나·이찬영 등 반공청년 대표들을 만나 보고 격려해 줍디다.>
◆주요일지(1953년4월5일∼8일)
※5일 ▲이대통령, 국군 제2군단 창설 1주년기념식 참석 ▲상병포로 교환 도의를 6일에 열기로 쌍방합의 ▲「나기브」요급수상, 계엄령 1년 연장
※6일 ▲쌍방연락장교 회합 ▲「유엔」군측 상병포로 인수 모의연습 ▲대구고법, 대통령저격미수범 김시현·유시태에 사형 ▲「이란」왕당파, 반정부「데모」
※7일 ▲상병포로 교환토의 급진전 ▲방미중인 「아데나워」수상, 「아이젠하워」대통령과 회담
※8일 ▲쌍방 교환할 상병포로 명단교환, 「유엔」군측은 5천8백, 공산측은 6백명을 각각 제시 ▲「아이젠하워」대통령, 국가안보회의 소집코 한국사태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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