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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박싱데이, 해외직구족이 달리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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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강일구]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오늘은 박싱데이(boxing day)라고 한단다. 사람이 촌스러워서인지 박싱데이라는 말을 이번에 처음 들었다. 한데 영국과 영연방국가들에선 크리스마스와 연계해 연휴로 즐기는 최대 명절의 하나란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처럼 대규모 세일행사가 벌어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싱데이의 기원은 수백 년 전으로 올라가는데, 상인들이 하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과 음식을 상자에 넣어준 데서 비롯됐다거나 영주가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후 농노들에게 옷과 곡식 등을 준 데서 유래됐다는 등의 얘기가 전한다. 또 교회가 이날 자선 상자를 열어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서 박싱데이가 됐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이날은 크리스마스 후 윗사람들이 아랫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었던 전통에서 유래된 날이다.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배에게 물어봤더니 박싱데이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게마다 떨이 세일을 하는 통에 쇼핑을 하러 다녔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25일이 아니라 26일에 받았던 적도 많았단다. 또 양말·수건·장갑 같은 선물을 포장해 우유배달원 등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어른들은 모두 축구경기를 보았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크리스마스 뒤풀이가 진하게 벌어지는 날이라는 거다.

 한데 우리나라의 박싱데이는 ‘해외직구족이 달리는 날’이란다.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직접 사는 소비자를 이르는 해외직구족은 벌써부터 박싱데이 할인 정보를 모으고, 할인이 시작되기를 기다려 곧바로 클릭할 태세를 갖추고 있단다. 카드업체들도 발 빠르게 해외직구족이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면 캐시백이나 추가포인트를 주는 등 다양한 혜택을 내놓고 마케팅을 벌였다.

 요즘 해외직구족의 활약은 눈부시다. 한국은행의 국민소득 통계(잠정)만 봐도 올 3분기까지 국내 소비는 2.6% 증가한 반면 국외 소비는 4.3% 증가했다. 또 3분기 국외 소비 지출은 6조5000억원에 육박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해외 관광과 함께 해외직구족의 지출증가가 한몫을 했기 때문이란다. 이에 우리나라 유통업계도 느닷없이 박싱데이 마케팅에 돌입했다. 나눔의 크리스마스는 희미해졌고, 쇼핑의 박싱데이가 새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우리나라엔 밸런타인데이니 박싱데이니 하는 외국의 기념일이 들어오면 모두 본질을 알 수 없는 ‘상업행사’로 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처럼 식물도 환경이 바뀌면 본질이 달라진다는데, 하물며 풍습이야 어찌 본질 그대로 받아들이길 기대할 수 있겠나. 그래도 아쉬운 건 물 건너온 귤이 더 달콤하게 개선되면 좋을 텐테 왜 모두 그 떫은 탱자로만 변하는지 하는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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