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정부 "불법 무관용" 원칙만 외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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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역대 정권마다 추진해온 철도 개혁은 번번이 좌절됐다.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키를 쥐었다. 박 대통령은 “당장 어렵다고 원칙 없이 적당히 타협하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것”(23일)이라며 불법 파업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천명했다.

 ‘원칙 없는 타협 불가론’은 박 대통령의 오랜 신념이다. 박 대통령은 올 초 북한의 도발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도 원칙 없는 타협은 없다며 버텼다.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상황까지 갔지만 결국 북한은 공단 문을 다시 열었다. 2009년 세종시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 야권 후보 단일화 경쟁이 한창일 때 캠프 내에선 “개헌 카드를 뽑아 들어야 한다”거나 “후보가 몸빼 바지라도 입어야 한다”며 이벤트성 처방을 주문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원칙을 지키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이미지로 투영되며 대선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이 앞세워온 원칙론이 철도 파업 사태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이번 사태의 해결 여부는 박근혜정부 개혁의 시험대다.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 펼쳐갈 공공기관 개혁은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천명한 원칙론으로만 문제를 풀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지적이 정치권에서 나온다.

 노무현·이명박 정부 때의 철도 파업과 비교할 때 불법 파업보다는 강경진압이, 국민을 볼모로 한 노조 이기주의보다는 민영화 공방이 더 부각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명박정부 시절이던 2009년 11월 26일부터 8일간 이어진 철도 파업 당시 여론은 정부 편이었다. 국민들은 고질적인 공기업 방만 경영을 고쳐야 한다는 데 손을 들어줬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한 이기적 파업’ ‘귀족 노조의 배부른 파업’이란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노조는 결국 백기를 들게 됐다. 2003년 6월 파업 때도 노무현정부는 여론을 등에 업고 노조와 전면전을 펼 수 있었다.

 현 상황은 그때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직접 “민영화는 아니다”라고 입장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영화 논란 속 파업 사태는 장기화하고 있다. 지난 22일 민주노총에 대한 공권력 투입으로 불법 파업보다는 강경진압 이미지가 부각된 측면이 없지 않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이석기 사태’ 등으로 인한 공안정국 논란도 부담이다. 이렇게 상황은 어려워지고 있는데 정부의 대처는 미온적이다. 박 대통령만 원칙론을 앞세워 고군분투하는 모양새다. 정홍원 총리나 서승환 국토부 장관이 노조 측을 만나 설득하거나 파업 현장을 찾았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해당 부처인 국토부 내부에선 “파업은 코레일 노사 간의 문제다. 간섭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코레일의 ‘파업 대응 지침’에 “파업 장기화 원인에 대해 일부 언론과 정보기관 등에서 코레일 간부들이 파업에 심정적 동조를 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다는 정보가 보고되고 있다”고 적시한 것을 보면 사실상 박 대통령 혼자 뛰고 있다는 게 명확해 보인다.

‘원칙을 저버린 타협은 없다’는 대통령의 외침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원칙이 통하기 위해선 총리와 장관, 국장과 과장들이 한마음 한뜻이 돼 뛰어야 한다. 파업 현장에서 철도 노조원들과 밤을 지새며 대화하고 타협하고 협상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 우칸촌 모델은 갈등 해결 사례로 참고할 만하다. 2011년 9월 광둥(廣東)성 루펑(陸豊)시 우칸(烏坎)촌에서 주민 7000여 명이 부패한 촌 정부의 토지 불법 매각에 항의해 3개월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장기화되자 광둥성 정부는 강제진압을 고려했지만 왕양(汪洋·현 부총리) 당시 광둥성 서기는 강제진압이 주민들을 감정적으로 자극시킬 뿐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대화를 통한 해결을 지시했다. 결국 3개월 후 지방정부와 시위대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고 주민들은 직접선거를 통해 새로운 촌 위원회 지도부를 선출했다.

 김재일(행정학) 단국대 교수는 24일 “ 장관들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며 “대통령이 원칙론을 내세우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하지만 총리와 장관까지 노조와 머리를 맞대지 않고 원칙론만 고수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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