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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과 빈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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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도청을 영어로는 「버깅」(bugging)이라고 한다. 속어지만 더 좋은 말은 없는가 보다. bug에서 비롯된 말. 원래는 빈대라는 뜻이다. 무시 무소로 스며들어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불쾌한 미생물을 도청장치에 비유한 것이다.
영국 수상을 지낸 「이든」경의 회고록에도 도청이야기가 나온다.
1954년 「제네바」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는 「호텔」을 박차고 나온 일이 있었다. 「호텔」방엔 그야말로 빈대처럼 도청장치가 되어있어서 마음놓고 무슨 말을 할수가 없었다.
또 말을 할때면 연필로 「테이블」을 두드리거나 해서 방해음파를 내야 했다. 그것도 한 두 번 이지, 줄곧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기 싫어서 그는 어느 개인별장으로 옮겨갔다. 당시 「처칠」 수상은 「이든」외상의 그와 같은 결정을 극구 칭찬했었다.
요즘 미국의 조야는 문제의 『빈대·스캔들』 때문에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웅성거린다. 이른바 민주당본부에 도청장치를 해놓았다가 발각된 「워터게이트」 사건. 그 관련자들이 모두 백악관의 요인들이어서 「닉슨」 대통령은 여간 난처하게 되지 않았다.
작년의 대통령선거전 중에 일어난 이 사건은 10개월만에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는데, 초점은 「닉슨」 자신이 관련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로 집중되고 있다. 그 정곡이야 어찌되었든, 「닉슨」은 적어도 도의적인 책임을 면하기 힘들게 되었다.
한 외신은 그 첫 단계로 백악관의 『대청소』를 지적하고 있다.
도청을 모의하고, 그 사건의 뒤처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한 관련자들을 백악관에서 모두 몰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제임즈·레스턴」은 백악관 개편 따위는 아주 냉소하고 만다. 문제는 그런 사건이 미국정치에 던져준 『공포와 의혹의 분위기』에 있으며, 본질적으로 이런 분위기의 개선에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백악관의 개편으로만 될 일이 아니고, 『「닉슨」 자신의 마음의 개편』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레스턴」은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근착 「뉴스위크」지에서 한 「칼럼니스트」는 그 사건을 「닉슨」 주변인사들의 충성심경쟁에서 비롯된 비극으로 보고 있다. 미국 「매스컴」들이 「닉슨」을 『리처드 왕』이라고 빈정대던 「가십」이 생각난다. 「닉슨」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인재를 당한 것도 같다.
「포커」놀이에서 「조커」를 일명 「버그」라고도 한다. 「버그」는 「스트레이트」나 「플래쉬」와 같은 결정적 판국에 끼어 들어 한몫 본다.
그러나 점잖은 「게임」에선 「버그」를, 그러니까 「조커」를 인정하지 않는다. 떳떳치 못하고 비굴한 임시변통이기 때문이다.
「닉슨」의 재선운동은 말하자면 「포커」에서 「조커」를 들이댄 꼴이 되었다. 「민주대국」으로는 도무지 체통이 서지 않는 노릇이다. 이 「버그」(bug)는 『이탈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버깅」사건은 결국 민심의 이탈현상까지 빚어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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