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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갑 된 '골목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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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올해 들어 ‘골목상권 살리기’ 명목으로 추진됐던 소상공인 정책들이 잇따라 삐걱거리고 있다. 특히 골목상권 보호를 앞장서 외쳐온 일부 소상공인단체들이 집단 이기주의 논란과 이권 다툼 등에 휘말리면서 ‘상생 경제’를 주창해온 초심을 잃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존 소상공인단체 등으로부터 ‘변종 SSM(기업형 수퍼마켓)’이란 비난을 받아온 상품공급점들은 최근 판매가격을 올려야 할 상황에 몰렸다. 상품공급점은 골목상인들이 대형유통업체와 독점 계약을 맺고, 상품뿐만 아니라 판매관리시스템(POS)과 경영 노하우 등을 지원받는 자영업 수퍼다. 이들 상품공급점은 대기업 유통업체와 독점계약을 맺은 다음, 일반 동네 수퍼보다 10~20%까지 상품을 싸게 공급받을 수 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300여 개의 상품공급점이 운영 중이다. 그러나 수퍼마켓협동조합 등이 대기업의 편법적인 골목 상권 진출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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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발이 거세지자 올해 10월 대형유통업체와 소상공인단체는 “동네수퍼와의 직거래 방식 대신 수퍼마켓협동조합을 통해 상품을 납품하고, 이들 조합이 각 개인 수퍼에 상품을 공급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2만여 명의 조합원을 둔 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는 한 발 더 나가 유통마진을 요구하면서 상품공급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수퍼마켓협동조합 측은 “협동조합 산하의 물류센터를 쓰는 만큼 대기업들은 상품을 공급할 때마다 협동조합에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골목상인단체 눈치 안 볼 수 없어”

 대기업 유통업체 임원은 “사실 골목상인들이 물류센터 이용료에 집착하는 건 그들이 정부보조금을 받아 지은 ‘나들가게(정부 지원 수퍼마켓) 물류센터’가 현재 무용지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며 “중간 마진을 지나치게 요구한다면 현재 운영 중인 상품공급점도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 유통업체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물건을 공급받는 상품공급점 사장들도 골목상인 단체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서울 용산에서 상품공급점을 운영하는 최경산(52)씨는 “주위 골목상인들로부터 ‘대형마트에서 받은 PB(자체 브랜드) 상품을 팔아서 수익을 남기면 좋으냐’ ‘당신들 때문에 장사가 얼마나 안 되는 줄 아느냐’는 말을 듣곤 한다”며 “그들 입장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업까지 방해하려고 하는 건 심하지 않나”고 머리를 저었다.

소상공인 법정단체 설립을 둘러싼 골목상인 단체들 간의 갈등도 심상치 않다. 현재 소상공인 법정단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박대춘 한국서점조합연합회장이 주도하는 소상공인연합회 창립추진위원회(창추위)와 최승재 인터넷PC방협동조합 이사장이 이끄는 소상공인연합회 창립준비위원회(창준위)로 양분돼 있다. 이들 두 단체는 올 한 해 거센 비방전을 펼치며 주도권 다툼을 벌여 왔다.

수퍼연합회장은 비리 혐의로 소환

 전문가들은 이들 단체가 극렬하게 다투는 데엔 ‘밥그릇 싸움’이 주된 이유라고 지적한다. 소상공인연합회는 설립만 되면 정부의 소상공인 진흥 예산(올해 기준 1조1378억원)의 상당액을 지원받거나 위탁받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당초 올 연말까지 설립 허가를 내줄 계획이지만 상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두 세력이 싸우는 근본 원인에는 소상공인 예산 약 1조원이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가운데 창추위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김경배(55) 수퍼연합회장은 지난 19일 비리 혐의로 경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회장 직위를 이용해 지자체 지원금 28억원, 민간투자 54억원 등 총 82억원이 투입된 경기북부물류센터(의정부시 소재) 건립 과정에서 무자격 협동조합이 지원금을 부당하게 수령하도록 지원한 혐의다.

 경찰 관계자는 “김 회장이 위조 서명 등을 통해 조합원 수를 120명으로 부풀려 지원금 28억원을 타내도록 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올 5월에도 중기청 산하 소상공인진흥원이 지원한 소상공인 교육비 3억1654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에 고발돼 수사를 받아 왔다.

“일부 단체 욕심, 상생노력에 찬물”

 임채운 서강대 교수(한국유통학회장)는 “소상공인연합회가 이권단체가 아니라 소상공인을 위한 일종의 지원단체인데도 헤게모니 싸움이 심해지면서 결국 이익 다툼만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주영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상생 경제의 구호에 편승한 몇몇 중소상인 대표와 단체들의 욕심이 되레 대·중소기업 간 상생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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