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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거리, 이번엔 전시성 강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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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구혜진
사회부문 기자

지난 20일 오후 2시. 경희궁 근처의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 공무원 60여 명이 강의를 듣기 위해 모였다. 서울시의 도시계획국·푸른도시국·도시교통본부 소속 공무원들과 시내 자치구의 도로관리·도시계획·도시디자인·교통행정 담당 공무원들이었다.

 이윽고 서울대 김성균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가 강단에 올랐다. 김 교수는 ‘걷고 싶은 거리 1호’인 덕수궁길의 설계자(1998년)다. 이날 강의는 ‘걷고 싶은 길 1호인데 관광버스 위해 좁힌 덕수궁길’이란 제목의 기사가 지난달 26일 본지에 나간 이후 서울시가 전문가의 의견을 듣자며 마련한 자리였다. 서울시 보도환경개선과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유사한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해 서울시내 실무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강의”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강연 내내 “걷고 싶은 거리를 제대로 조성하려면 한국적 조형물인 ‘정자’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자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게 지어진다”는 거였다. 김 교수는 “이 원리를 거리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덕수궁길 설계 과정도 설명했다. “ 돌담길에 면해 있는 모든 건물의 벽돌 색을 색채 측정기로 정밀하게 측정했어요. 걷고 싶은 거리의 보도 블록을 주변 건물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색으로 설계하기 위해서였죠.”

 덕수궁길의 모양뿐 아니라 길로 주변 경관을 끌어 오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덕수궁길이 2011년도 국민이 뽑은 가장 사랑하는 길 1위가 됐다고 김 교수는 소개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최근 주변 경관과의 전체적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보도 블록을 교체했다. 사괴석도 아스팔트로 덮어 버렸다. 덕수궁 걷고 싶은 길이 공사 이전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비단 덕수궁길뿐만 아니라 서울시 자치구 차원에서 조성한 걷고 싶은 거리 중 일부는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지은 게 적지 않았다. 서울 은평구 서부시장길, 양천구 신월동의 걷고 싶은 거리 등이 그랬다. 재래시장과 주택가가 혼재한 동네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었다가 이후 원상 복구 결론이 났다. 시류를 앞서가지 못하고 뒤따라 간 결과 실속 없는 ‘전시행정(展示行政)’의 사례로 낙인이 찍힌 셈이다.

 김 교수가 강의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세종시 신정부청사도 주변 풍경에 대한 고민이 없어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고 비판할 때였다. 청중석 일부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60명 중 절반가량이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마치 ‘전시용 강연’을 본 것 같아 강연이 끝난 후에도 씁쓸함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구혜진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