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명약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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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00점 만점에 27점. 오늘의 대학생이 갖고있는 한자 쓰기 실력이다. 거의 백지나 다름없다. 자의해석은 더 한심하다. 24점. 이것은 한국어문연구회가 전국 유수 대학의 학생 8백 7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밝혀진 것이다.
아전인수, 사필귀정, 백골난망, 노사, 이재보상, 자위-. 이상은 한자표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기본 이해부터 되어있지 않다. 새삼 한글 일변도의 교육이 얼마나 충격적인 폐해를 가져왔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자의해석에서도 그런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희기념」은 『고대 희랍의 축제일』. 「독과점」은 『과자를 독자적으로 파는 곳』. 「삼강오륜」은 『낙동강·한강·두만강·청홍백흑남』. 「명약관화」는 『쓴 약 일수록 효과가 크다』….
새삼 한글세대와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이 한자문화의 바탕에 뿌리를 펴고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자의 이해도에서 보여주는 단절은 한글문화의 공동을 절감하게 한다.
이와 같은 단절과 공동은 「한글전용」과 「한자교육」을 혼동한 종래의 어문정책에도 큰 책임이 있다. 최근 상용한자의 교육이 다시 시작되긴 했지만, 일 주일에 한 시간 정도로는 그 실효가 의심스럽다. 다른 외국어나 마찬가지의 배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일어교육까지 장려하는 현실에서 유독 한자교육만이 백안시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한자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흔히 비능률을 그 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인 견해에 불과하며, 오히려 문화에의 적응력을 약화시키는 점에선 그것이 더 비능률일 수도 있다.
지·기·답·수초·용지·독·전화·신괴수·고·강·적취·회화·두·소조·학교·약기·흑·문·성·급식…등은 일본 소학관 발행 5월호 「2년 생」잡지에 나오는 한자들이다 우리 나라 국민교 2학년생이 이런 한자들을 거침없이 읽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일본에서 새로운 세대의 비능률을 한탄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일본의 독서열은 세계 어느 국민에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결단과 끈기이다. 우리는 아직도 어문정책에 깊은 신념과 철학이 없다. 지극히 소극적이고 임기응변적이다. 언어에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뜯어고칠 수 없다. 우리가 온전한 한글문화를 건설하는 길은 한자교육의 제한이나 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글의 토착화·순화에 있다.
대학생의 그 낙제점수는 충격과 함께 문교당국에 「아차!」하는 경종도 울려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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