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법인 몰랐나 눈 감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SK글로벌의 회계감사를 담당한 영화회계법인은 1조5천억원에 달하는 SK글로벌의 분식회계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검찰은 금융감독원에 영화회계법인의 부실감사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으며, 조사결과에 따라 사법처리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같은 검찰과 금감원의 강경한 태도는 SK글로벌이 부채를 누락시키고 가공자산을 계상하는 등 분식회계 수법이 전형적이고 단순했는 데도 이를 가려내지 못한 것은 회계감사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진행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회계법인의 부실감사 문제는 지금까지 분식회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제기됐다. 조흥.우리은행 등이 이미 대우 계열사들의 회계감사를 담당했던 회계법인과 회계사에 대해 부실감사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상태다. ㈜쌍용의 무역금융 사기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담당 회계법인의 부실감사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한 증권사의 주식인수업무 담당자는 "코스닥 등록 예정기업의 경우 기업 규모가 작아 수수료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회계감사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코스닥위원회의 예비심사까지 통과한 이오정보통신이 분식회계에 따라 등록이 중단됐던 것도 회계감사를 제대로 했다면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감사를 담당한 회계법인과 회계사에 대한 제재조치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9월 재정경제부가 국정감사에서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이후 3년 동안 부실회계감사 등으로 처벌받은 공인회계사는 3백50명에 달했다.

그러나 대부분 주의.감사업무 제한이 고작이고, 최고 징계인 '등록취소' 처분을 받은 회계사는 2명에 그쳤다. 직무정치 처분을 받은 경우도 35명에 불과했다.

한 회계법인이 특정 회사에 대한 감사를 수년씩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과 회계법인의 유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영화회계법인의 경우 SK글로벌에 대한 감사를 10년 이상 실시해 왔다. 검찰도 "회계감사법인의 정기교체를 의무화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지만 현재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다.

정기적으로 회계법인을 교체하는 문제는 2001년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을 개정하면서 논의됐으나 공인회계사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또 지난해 미국이 회계제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내에서도 도입 여부를 검토했다.

그러나 미국이 도입을 유보하자 국내에서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다만 금감원은 지난해 감사를 담당하는 회계법인의 파트너(이사)는 3년이 지나면 교체하도록 했다.

금감원 황인태 전문위원은 "정기적으로 회계법인을 교체하는 문제는 시장논리에 위배된다는 의견이 많아 당장은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지난해 논의됐던 사업보고서에 대한 대주주의 책임 강화 등에 대해서는 다음달 중 공청회를 거쳐 이른 시간 내에 법제화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금감원이 지난해 기업들의 감사보고서에 대한 감리 결과를 집계한 결과, 지난 한 해 동안 감리를 받은 86개사 가운데 50%에 가까운 41개사가 분식회계를 했다가 적발됐다.

이 중 무작위 표본추출이나 일정 요건에 의해 대상이 선정되는 일반감리의 경우 51개사 중 15.7%에 해당하는 8개사가, 분식의 의심이 가는 기업에 대해 실시하는 특별감리는 35개사 중 94.3%인 33개사가 실제로 분식회계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별감리의 경우 분식 혐의가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해 적발된 기업의 수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기업 5개 중 최소한 1개 정도가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