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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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콩나물 시루 같이 빽빽하게 사람을 태운 「버스」에서 시달리다가는 차가 미처 서기도 전에 차장에게 등을 밀리어 내린다.
건널목에서 마저 신호등도 아랑곳없다는 듯 먼지와 매연을 한껏 풍기며 질주하는 자가용에 칠 뻔하다 보면 『제기,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자가용부터 하나 마련해야지』하는 생각이 불쑥 치민다.
그러나 어쩌다가 자가용이라도 얻어 타고 학교엘 가게 되면 역시 마음이 편치 못하다.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그리 곱지 못한 눈초리가 모두 내게로 쓸리는 듯 불안하다.
하기야 한달 월급이 자동차 유지비보다도 적은 대학교수 주제에 자가용을 타고 출강을 한다는 자체가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는 이 하나 없는 골목길을 지나갈 때도 불안하고 송구스러움은 마찬가지이다. 길을 걸어가던 어린이들이나 심지어는 강아지조차도 선뜻 길을 비켜 주지 않고 오히려 『치일 테면 치어 보아라』하는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미국 같은 데서는 아무리 크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닐 때라도 느껴 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이다.
그러고 보면 비가 올 때는 짚신 장사하는 아들 걱정을 하며 울고, 날이 개면 나막신 장사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울었다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가용에 치일 위치에 놓이게 되면 굴욕감을 느끼는 한편 자가용을 타고 앉아서도 침울한 생각을 금치 못하는 것은 생활의 비극적인 요소에만 민감하도록 내 감수성이 왜곡되어 있는 때문일까?
자동차의 신세를 질 필요도 없이, 또 자동차에게서 피해를 볼 염려도 없이 모든 시민이 활개치고 걸어다닐 수 없는 거리란 이제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싫든 좋든 자동차에 몸을 싣고 보행자의 역겨운 눈초리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차가 풍기는 독한 「가스」를 마시며 목숨을 내걸고 길을 건너야 하는 두 입장 중 어느 한가지에 놓여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남에게 짓밟히는 것보다는 밟는 위치에 놓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투어 자가용을 타는 입장에 서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동차가 많아졌다는 것은 물론 우리 경제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실 자체를 통탄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 발전이 무한히 계속되어 우리의 국민 누구 나가 다 자가용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다만 너무도 유감스러운 일은 자가용의 수효란 봉건 체제하의 귀족의 수효나 마찬가지로 무한히 늘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비좁은 서울 거리가, 아니 작은 우리 나라의 땅덩어리 전체가 수용할 수 있는 자동차의 수효란 인구의 수에 비해 너무도 심히 제한된 것임을 출퇴근 시간에 서울 거리를 차를 타고 다녀 본 사람이면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자가용을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다는 전망이란 이처럼 밝지 못한 까닭에 자가용을 타지 못한 사람이 자가용을 탄 사람을 바라보는 눈초리에는 선망보다는 질투와 적개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지.
짓밟는 층에도, 짓밟히는 층에도 끼이지 않은 채 푸른 나무 우거진 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선택의 자유란 우리에게서 영 가 버린 것인지. 【이인호 <고대 부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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