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양산과 「포에지」의 빈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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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예전에는 운문이면 시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이는 순전히 시를 외면적인 의미에서 대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시에서는 산문으로도 시를 쓰고 있다.
「포이지」가 담긴 산문형의 시, 또는 산문시가 그것이다. 시를 내면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입장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차라리 「포이지」가 없는 운문보다「포이지」가 있는 산문 쪽을 택한다.
전자는 다분히 언어의 분식에 머무르지만 후자는 창조적 「리얼리티」를 갖기 때문이다. 시의 이상 같아서는 「포이지」가 있는 운문이 소망스럽지만 운이나 율격에 집착하다 보면 「포이지」를 놓치기 쉽다.
무릇 현대시에서는 시의 생명을 「포이지」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형태나 내용에 구애됨이 없이「포이지」 즉 예술 하는 정신이랄까 예술적 창작성이랄까, 아뭏든 그런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시냐 아니냐를 식별하는 것 같다.
시는 많아도 시가 별로 없다는 말은 바로 이 「포이지」가 결여된 운문이나 항만 바꿔 놓은 산문이 시로서 많이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달에 나온 월간시지에 만도 각지가 그 좁은 지면에 자그마치 시작품을 50여편 씩 다루고 있다. 시인들의 왕성한 발표 의욕은 충분히 살필 수 있으나 정작 「포이지」가 담긴 작품을 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지경이다.
대체로 시지에 시론이나 시에 관한 「에세이」의 전개가 활발치 못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개진할 줄 모르는 시인의 산문 정신의 결핍에서 오는 현상인지도 알 수 없다.
올올이 뼈 속에 빚진 무늬를
여기 외진 해 그늘에 꼬부려
열 손가락을 두고 셈하기로니
풀리잖는 금리를 접으면 창너머 보이는 산 그늘①
그는 1인용의 독방을 즐기고, 밤 열시경 불을 끄고 누워「브람스」를 듣고, 가끔 서대문 「로타리」 먼지낀 가로수길 찻집에 나타난다. 올 여름 장마 땐 우산도 없이 빗물 흠뻑 뒤집어 쓴 「비틀즈·스타일」로-②
너와 내가 주고받은 수백통의 편지를/헤어지자며 불태워 버렸을 때/편지는 한줌의 재가되어 때마침/불어오는 바람에 가랑잎들과 함께/어디론가 사라져 갔을 때/저 가로등「시멘트」기둥을 안고/네가가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을 때③
ⓛ은 「현대시학」에서, ②는 「시문학」에서 ③은「물과 별」에서 골라낸 시구들이다.
①에는 운은 있으나「이미지」로 부조되는 것이 없다. 언어가 표현에 기여하지 않고 멋대로 조립되어 있다. 다만 시적인 어휘를 동원하여 시정을 돋우느라 애쓴 흔적은 보이나 가령〈뼈속에 빚진 무늬〉 〈풀리잖는 금리를 접으면〉따위의 언어 구사는 극히 전달력이 희박하다. 「포이지」가 없는 운문의 한 본보기이다.
②에는 율격도, 정염도 나타나 있지 않다. 「콩트」의 한 대목 같은 평이한 서술체 문장이다. 「모던」한 외래어를 섞어 일상 범사를 조금은 「유니크」하게 기술한 산문이 시로써 발표된 경우이다.
③에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소년적인 감상이 깔려 있다. 평범한 산문을 행만 갈라놓았다 뿐 「포이지」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 세낱의 경우와 비슷한 작품은 이달의 시지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이비시 내지는 비시가 시라는 이름으로 번식하고 있다는 것은 단적으로 우리시의 빈곤을 말해 주는 난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문득 떠오르는 당시의 한 귀절이 있다.
일편장안월 만고침타음
장안하면 광대한 지역을 가진 절대적인 도시를 연장시킨다. 여기에 떠 있는 한 조각 달, 으슥한 밤에 어디선가 만고의 다듬이 소리가 고요한 장안에 울려 퍼진다는 이 시구에서 나는 「포이지」를 느낄 수 있다. 일과 만, 쟁과 동의 연결, 그리고 극단한 것을 서로 부합시키는 상상 작용이 「포이지」에의 승화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상황만 제시되고 관념이 배제되어 있는 이 시구와는 대조적으로 김현승씨의 『마음의 집』(월간중앙)은 「이데아」의 산물이다.
내 마음은/네가 생각하듯
내 속에 있지 않다
나는 도로혀
내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내 마음속에서 나오고
또 문을 닫곤/들어간다.
김씨의 「에스프리」는 외부에의 확산보다 내면에 응결하여 관념으로 표출된다. 내 속에 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내가 살고 있다고 자아의 소재를 「패러독스」로 구명하고 나선다. 즉, 마음을 「나」라는 존재의 집으로 보고 그 속에서 나오고 또 문을 닫고 들어간다는 발상은 그가 관념을 물질화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병화씨의 『남남』(현대시학)은 지금까지 그가 영위해 오던 수채화풍의「스케치」에서 많이 묵화적인 「터치」에 옮아와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만큼 인생론적인 「모럴」과 관념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남남8』에서는 허탈과 체념의 경지가 설화조로 차분하게 표출되어 있다. 애수도 깔려 있다. 관념이 이쯤 용해되면 침투력을 가지게 마련인가. 「현대시학」에 새로 연재를 시작한 김춘수씨의 처용단장2부 『들리는 소리』는 무사상의 의미 같은 것을 노린 듯 하다. 무사상의 사상 같은 것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그에게도 즐겨 쓰는 어휘가 있긴 하지만 좀처럼 「리프레인」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슷한「톤」에 낱말만 바꿔 가지고 되풀이를 하고 있다. 그의 되풀이는 마치 제자리 뛰기에서 숨에 겨워 이제는 심호흡으로 전환한 운동에 비유될만 하다. 그처럼 그는 언어표현의 극단한 절제를 해 왔었다. 이번 시도에서는 「리듬」에 대한 새삼스런 배려도 있어 보인다. 【김광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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