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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클리닉] 부부 싸움에 멍든 자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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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부모님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 편지를 드립니다. 싸움은 늘 사소한 이유로 시작되지요. 예컨대 어머니가 계 모임에 갔다가 어쩌다 늦게 들어온 날엔 아버지가 그걸 트집 잡아 싸움을 겁니다(물론 아버지는 평상시 거의 매일 자정을 넘겨서 귀가하시죠). 말다툼 끝에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고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릅니다.

며칠 전에는 급기야 동생이 경찰을 부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데 아버지가 다른 것이 먹고 싶다며 냄비를 엎은 데서 시작됐습니다.

어머니가 화를 내셨고 아버지는 상을 부수고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말리자 아버지는 TV를 보고 있던 애꿎은 동생에게 화풀이를 심하게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가 끼어들면서 부부싸움이 계속됐고 동생은 슬쩍 밖에 나가 경찰에 아버지를 신고해버린 겁니다.

아버지는 신고 사실을 알고선 "이런 자식들 하고는 못살겠다. 당장 이혼하자"며 "집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오죽하면 애가 그러겠느냐"면서도 "가출은 하지 말라"고 아버지를 말렸지요. 아버지는 결국 집을 나가셨는데 아마도 출동한 경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하룻밤 외박하신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귀가하자마자 대뜸 욕설과 더불어 "우린 이미 파탄난 가정이다. 이혼해야겠다"고 외쳤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마다 바락바락 대드는 어머니와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부모님은 수시로 밤늦게 고성을 지르며 싸웁니다. 항상 비슷한 상황인데, 어머니는 큰 소리로 할 말을 다 하려 하고, 아버지는 폭력으로 제압합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던진 화분에 어머니가 머리를 맞아 크게 다친 일도 있어요. 싸움은 항상 어머니가 실컷 맞은 후 잠잠해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도 정이 없는 듯합니다. 제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어요. 언젠가 아버지 기분이 괜찮아 보여 용기를 내서 우리 집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빠 잘못은 인정하지만~"이라고 한 뒤에 "우리 집 상황은 개선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간 아버지는 생활비 대주는 것 말고는 가족을 위해 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이혼하면 재산은 한푼도 못준다"면서 "자식들은 버리든지 키우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무책임한 얘기를 해 어린 우리들 가슴을 멍들게 합니다. 자식을 이렇게 쉽게 내팽개쳐도 되는 것인지요.

저는 싸울 때마다 소리치며 대꾸하는 일만 되풀이하는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요. 또 어머니도 저희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남들 앞에서 자랑할 게 전혀 없는 자식들"이라고 나무랍니다. 우리도 할 말이 많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시라. 우리도 부모님에 대해서 남들한테 자랑할 일이 전혀 없다'고 대들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두 분 다 자신들로 인해 불행해진 자식들에겐 미안해하지 않아요.

어버이로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부모가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이혼으로 파경을 맞는 상황은 더 싫습니다. 이혼한 집 자녀들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을 늘 했었거든요.

고교 1학년도 되고 해서 정말 마음 잡고 공부하고 싶은데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른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인해 어떻게 마음을 추슬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교 1학년 순이(가명)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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