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경제개혁 일단 미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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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2일 오전 일본 도쿄의 총리관저에서는 금융시장 불안과 관련해 내각부.재무성.금융청.경제산업성 등 경제 관련 정부부처 차관 전원이 참석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상황의 긴박함 때문에 그동안 정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해온 일본은행의 간부들까지 이례적으로 회의에 소집됐다. 닛케이지수 7,900 붕괴의 충격은 정치권과 언론에도 번지고 있다.

자민당 등 여당연합은 11일 급거 '금융정책 프로젝트팀'을 구성했다. 요미우리신문은 12일 조간 1면 머리기사로 '비상사태의 경제위기-여섯가지 긴급 제언'이라는 제목하에 "총리는 정책의 대전환을 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기업들도 난리다. 12일 만난 한 기업인은 "하루아침에 수십억엔의 평가손이 났는데 몇푼 아끼려고 열심히 뛰어봐야 무슨 소용이냐. 일할 맛이 안난다"고 했다.

12일 닛케이지수는 일본은행이 1조엔의 자금을 시중에 풀고 각종 안정대책이 발표되면서 소폭 상승한 7,943.04로 마감했다. 하지만 시장은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다.

◆일 정부의 금융안정대책=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실현 가능한 정책은 총동원하겠다는 방침이다. 먼저 내년 9월부터 실시하기로 했던 은행의 주식보유 제한 제도를 2년 정도 뒤로 미룰 방침이다.

은행이 자기자본의 범위 내에서 주식을 보유하도록 제한하게 될 경우 은행이 보유 주식의 매각을 서두르게 돼 증시가 얼어붙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2005년부터 실시하기로 했던 새로운 회계처리 방식도 일단 유보할 계획이다. 정부는 당초 2005년부터 기업들이 갖고 있는 주식.채권 등의 유가증권과 토지 등 고정자산의 가격을 현재의 시장가격, 즉 시가로 처리하도록 했었다.

잠재적인 위험까지 재무제표에 드러나도록 해 투명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를 최대한 연기시켜 기업의 수익성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자는 게 일본 정부의 의도다. 이와 함께 현행 시가회계제도를 일시 동결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또 2003년도 예산을 상반기에 앞당겨 집중 집행함으로써 돈을 시중에 넉넉히 풀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긴급 수혈'효험 있을까=전문가들은 정부와 일본은행의 이 같은 '긴급 수혈'의 효과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다. 모든 대책이 '눈 가리고 아웅'식인 데다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은행의 주식보유 한도 제한 제도를 연기한다고 현재 6조엔(약 60조원)에 달하는 주식평가손을 떠안고 있는 은행들이 주식을 내다팔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선 "최근 6개월 사이에 평가손이 두배가 된 은행들 입장에선 조금만 주가가 올라도 주식을 털고 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가제도를 일시 중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제도가 시행된 게 2년도 채 안된 데다 결국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기업들이 손실을 숨기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공산이 크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는 꼴이다.

또 디플레 극복을 위해 예산을 조기 집행하게 될 경우 결국 국채를 떠 찍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 경우 재정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일본의 국채 의존도는 전후 최고 수준인 44.6%에 달하고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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