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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퇴직금 날리는 사회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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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논설위원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50대가 퇴직금을 날리는 세 가지 방법. 설마 그중 하나에 내 이름을 올릴 줄이야. 내 이름은 재택구. ‘난달라’와는 절친이다. 난달라가 누구냐고? 지난주 이 난에 등장한 주인공. 퇴직금을 빵집에 털어 넣었다 홀랑 날린 친구다. 내심 그를 비웃었지만 나도 별수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한민국은 재테크 불모지대였다. 우리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에겐 더욱 가혹했다.

 ‘또 주식 하면 개XX’란 맹세를 깨고 내가 20여 년 만에 다시 주식에 손댄 건 2년 전. 나름 철저한 투자 원칙을 세웠다. ‘우량주로만 승부한다. 과욕은 금물, 벤치마크(종합주가지수)보다 3%만 더 수익을 낸다. 손절매와 기대 수익을 확실히 챙긴다. 묻지마 투자, 테마주 투자는 절대 안 한다.’ 30대의 팔팔한 나이, 대박을 꿈꾸다 쪽박 찼던 실패를 교훈 삼았다. 퇴직금을 들고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이대로만 하면 필승, 대박도 가능하리라.

 시작은 정석대로, 조심조심. 공부부터 다시 했다. 증권사 추천 종목도 따라잡았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또 다른 절친, 전직 증권사 임원 L이다. 그는 사설 투자회사를 운영 중이다. 그의 조언대로 퇴직금의 반은 펀드에, 반은 우량주를 샀다. 조금 이득을 봤지만 감질만 났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좀 안다 싶으니 욕심이 났다. 한 방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L은 “바이오가 답”이라고 했다. 유망 기업을 직접 찾아 가봤다. 오너들도 만났다. 치매관련주, 항암관련주, 여성호르몬주…. 한 방의 꿈이 무럭무럭 부풀었다.

 하지만 역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고르고 고른 주식들은 모조리 내 기대를 외면했다. A주는 주가가 이미 너무 많이 올랐고, B주는 확신했던 임상시험이 실패했으며, C주는 곧 된다던 당국의 허가가 끝내 안 떨어졌다. 퇴직금은 확 줄었다. 다급해졌다. 다짐했던 투자 원칙이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더 한 방에 매달렸다. 테마주에 묻지마 투자까지 서슴지 않게 됐다. 급기야 빚을 내 주식을 샀다. 긴장과 초조, 한시도 증권단말기(HTS) 앞을 떠나지 못했다. 어느새 손엔 빚만 남았다. 친구 L은 “여의도 프로들도 올핸 대부분 쪽박 찼다”며 “무모했다”고 혀를 찼다. 나쁜 녀석. “대박 날 거야” 꼬드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이라니.

 날더러 바보라 하지 말라. 문제는 그 놈의 초저금리였다. 15년 전만 해도 1억원을 은행에 맡기면 다달이 이자로 100만원을 챙길 수 있었다. 투신사에선 150만원도 가능했다. 지금은 한 달 30만원이 고작이다. 이런 초저금리가 ‘은퇴 후 40년 더 산다’는 고령화의 공포와 맞물렸으니 그걸 누가 견디랴. 한국의 은퇴자들 평균 연령은 53세, 그나마 최후의 방패라는 국민연금 수령까지는 10년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가만있다간 연금 타기 전에 말라 죽을 판이다. 그야말로 한식에 죽나 청명에 죽나다. 이왕이면 한번 저질러나 보자. 고민 끝 선택이 주식이었다.

 다른 선택지? 없었다. 대한민국은 은퇴용 재테크가 없는 나라다. 퇴직연금 수익률은 0%에 가깝다. 펀드도 마이너스 수익률이 나는 판이다. 부동산 임대 같은 대안 투자는 몰라서, 돈이 없어 못한다. 선물·옵션이며 파생결합증권(DLS) 같은 파생상품에 투자하기는 겁이 난다. 머리는 굵었고 용어는 낯설고 복잡하다. 겨우 암호문 풀듯 더듬거리며 해독한들 막상 베팅하기엔 손이 떨린다. 스캘퍼며 데이트레이더며 젊은 전문 투자자들이 설치는 판이다. 어디 함부로 50대 아마추어가 명함을 들이밀랴.

 내년엔 좀 달라질까. 아닐 것이다. 세제 혜택을 주는 금융 상품은 전부 연봉 5000만원 이하 직장인에게 맞춰져 있다. 한국형 헤지펀드 같은 고수익 고위험 상품은 5억원 이상만 투자가 가능하다. 나 같은 소시민 은퇴자에겐 이쪽도 저쪽도 길이 없다. 얼마 전 파산한 동양그룹의 연 8%짜리 기업어음(CP)에 왜 4만 명이나 몰렸겠나. 거기 돈을 넣었다가 쪽박 찬 사람들 심정, 나는 십분 이해한다. 그러니 내 이름 재택구, 이름값 못했다고 비웃지 말라.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