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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장성택 사건 : 격랑의 한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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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2013년 12월, 세계는 범상치 않은 두 죽음과 만났다. 하나는 깊은 애도와 존경으로, 다른 하나는 오싹한 충격과 경악으로.

 만델라와 장성택의 극적인 삶과 죽음은 그렇게 지구촌의 눈을 집중시켰다. 특별히 나치 전체주의 등장 80주년을 맞는 올해 두 죽음을 보는 유럽의 눈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치 80주년 현장에서 맞는 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은 한국시민인 필자에게 인간이 만든 최악의 폭력인 전체주의와 전쟁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일상의 반성행사들에 자주 참여하며 인간 악행들을 재삼 되새겨본 연유였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잡혀가던 길옆 교회들이 갖는 연속 기도였다. 그들이 아우슈비츠와 집단학살로의 행진을 계속할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 먹고 기도하던 인간과 종교에 대한 무한회개였다. 참여자들의 눈빛과 눈물은 말없이 서로 깊었다.

 둘째는 베를린 시내 곳곳에 설치된 ‘파괴된 다양성’ 전시회였다. 베냐민, 아렌트, 브레히트, 에른스트 블로흐, 아인슈타인, 쇤베르크, 레마르크 등 나치의 등장과 함께 말을 빼앗기고 죽고 망명한 지식인과 문화인들의 행록과 비극을 반추하는 행사였다. 그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법률과 사법체계를 정초한 에른스트 프랑켈도 있었다.

 셋째는 베를린 필하모니, 베를린 돔, 각종 문화시설의 계속되는 레퀴엠 공연이었다. 특히 모차르트와 베르디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는 유대인 학살, 일본군 성노예, 한국전쟁 학살, 북한 수용소의 참상들을 연속 떠올리게 했다. ‘평안을 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절규하는 독창들과 합창들은 온몸의 세포들을 숨 막히듯 쭈뼛하게 했다.

 진심 어린 진혼과 위무, 화해와 평화가 승전기념보다 더욱 절실했던 종전 60주년의 한반도에서 세계를 섬뜩하게 한 북한발 처형 소식은 일상에서 밀려나 있던 북한 체제와 한국 문제의 구조와 본질을 현실의 실제 문제로 성큼 끌어내었다. 곧 전체주의와 남북대치 문제였다.

 권력구축 과정에서 유일체제구축 때까지 계속되었던 두 선대의 숙청 방식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은 두 선대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승계 및 권력기반의 최대 후원자를 제거했다. 즉 자기침식이었다. 둘째 30년 이상 국가운영 전반을 관여하고 주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최고권력자의 국가운영경험 부재를 보완해준 하위동반자를 제거했다. 셋째 집권2년 내의 초단기간에 숙청·처형을 감행했다. 넷째 비혈통과 연합해 (방계)혈통을 숙청한 최초 사례였다. 선대와는 완전 반대였다. 끝으로 세계를 향한 공개숙청도 크게 달랐다.

 국가운영의 보편성에서 보건, 북한체제의 특수성에 비추어 보건 이번 숙청이 초래할 효과는 역진적이다. 젊은 유일권력자는 이제 권력과 결정권의 독점만큼 능력과 책임도 직접 증명해야 하는 막중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국정운영의 효율성은 권력의 집중·독점과는 반비례하는 반면 권력의 분산·공유와는 비례한다. 세계사가 증명하듯 체제경쟁에서 독재체제가 민주체제를 당해내지 못하는 필연적 연유다.

 최고지도자 이외의 누구도 의견과 책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초과달성’ ‘노력영웅’은 계속 배출되나 체제는 더욱 퇴락한다. 아렌트가 통찰하듯 독재·전제·전체주의는 언제나 자기파괴의 요소를 스스로 배양한다. 억압과 공포, 폭력과 숙청의 반복은 모든 인민을 수동적 노예와 저항의 주체로 양분한다.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독재성과 유일성이 강화될수록 수동성·무동성(無動性)·노예성은 더욱 증대된다. 표면의 ‘건성건성’이 처벌받는다면, 표면적 열광과 내면적 무동성을 결합한다. 그럴수록 참여와 발전과 효율은 퇴보한다. 독재성과 유일성이 건강한 이견과 대안제시, 생산적 갈등과 경쟁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국가노선의 수정도 불가능하다.

 개인과 국가, 체제와 문명은 생각과 의견, 견해와 관점의 갈등을 통해 발전한다. 요체는 이견과 갈등의 봉쇄 자체가 전혀 아니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어떻게 그것을 통합과 균형으로 수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개인과 체제가 같다.

 이번 격동을 계기로 기로에 선 북한이 위로부터의, 또는 아래로부터의 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인가? 또 수차 독재체제를 타도해 대안제시, 자기교정, 체제발전의 역사를 보여온 남한이 전 한반도의 바람직한 변혁을 견인해낼 수 있을 것인가? 북한 견인과 전체 한반도 격변을 감당할 만큼 남한 체제는 지금 내부의 극한대결을 통합할 민주주의와 통합능력을 갖추었는가? 종전 60주년, 진혼과 위무, 화해와 평화 대신 숙청과 위기의 격랑 앞에 놓인 한반도가 직면한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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