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5)김재봉 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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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국요리점 아숙원2층에는 20여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오랫동안 벌러오던 조선공산당의 결성대회를 한참 진행 중이었다. 전회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주연 상을 앞에 차러 놓고 짐짓 연회를 하는 것처럼 회의를 했다.
모인 사람들은 김재봉 김찬 김야수 주종건 윤덕병 진병기 조동우 조봉암 송봉우 김상주 전진희 독고전 등 각파대표12명과 그밖에 박헌영 정운해 최원택 이봉수 김기수 신동호 홍덕유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 가운데 북풍회계는 김야수 송봉우 정운해 민중두(1923년8월에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소속으로 주종건 이봉수 신생활사계의 전진희이 외에는 거의 화요회계 사람들이었다.
먼저 김재봉이 좌중의 일동을 향해 개회선언을 하였다. 김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장대한 체격이었다.
이날의 사회는 이마가 훤칠하고 재기가 넘쳐 보이는 김야수(김두전이라고도 불렀음)가 맡았다. 김은 북풍회의 대표격으로 가라앉듯 조용한 목소리로 치사를 했다.
그는 먼저 치사에서 『조선에 있어서의 사상단체의 운동을 그 역사로 볼 때는 몇 년 밖에 안되지만 그 양에 있어서는 대단히 많아 졌읍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하등의 질서 잡힌 운동방침이 없습니다. 오늘 모임을 통해 이에 대한 대응책을 협의코자합니다』고 이날 집회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인사말을 했다.
이때 김재봉이 다시 일어서서 『조선 내에 있어서의 사회운동은 해마다 복잡을 더해가므로 이를 유도하는 결사조직을 아니치 못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자 김찬이 일어서서 결사의 명칭은 조선공산당이라고 부르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처음 당명은 기왕에 해외에서 사용하였던 고려공산당으로 하느냐, 조선공산당으로 하느냐의 두 가지 명칭을 놓고 논의하였다. 조선이란 말이 대외적으로는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영국·독일·「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들까지도 Korea즉 고려라고 하면 다 알지만 조선하면 잘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고려라는 이름을 당명의 머리로 붙이는 것은 왕년의 고려공산당의 전철을 밟는 불길한 징조도 있고 또 파별 싸움만 일삼은 해외의 고려공산당과 혼동을 일으키기 쉬워 생소한 대로 조선공산당이라고 부르기로 가결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지방대표들의 현지 실정보고도 좌담형식으로 있었다. 신의주에서 온 독고전은 국경지대의 사상동향이 국내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간다고 보고했고, 영남대표로 마산에서 온 김상주와 호남대표로 광주에서 온 신동호는 지방에서 사회주의사상이 널리 보급되어있으므로 결사활동의 장래가 유망해진다고 보고하였다.
이어 당 기관조직과 간부선출에 들어갔다. 선출은 미리 「프로그램」에 짜여있는 듯 김찬·조동우·조봉암 3명을 전형위원으로 뽑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는 7인 집행위원과 3인 검사위원을 선임하도록 위임하고 회의는 일사천리로 끝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일동은 또 술잔을 들리며 건배를 하고 너털웃음을 웃기도 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를 맡았던 원로공산주의자 김철수씨(81·전북부안군백산면대수리생존)에 따르면 이때 창당 때의 소위중앙당부부서는▲비서 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 조동우 ▲선전 부 김찬▲인사 부 김야수 ▲노동 부 정운해 ▲정경 부 명진희 ▲조사부 주종건 이었다한다. 그래서 창당 때의 조선공산당은 김재황이 책임비서 이었다해서<김재봉 당>이라고도 불렀다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원칙으로 진행하자면 당의 강령 규약을 심의해서 통과해야 했을 것이나 강령 규약을 내놓으면 여러 가지 증거자료가 표면에 나타나게되고 또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므로 다음회의에서 결정키로 미루었다는 것이다. 회의를 하는 중에도 일동은 행여 경찰이 현장을 덮치지나 않을까 해서 조바심을 태우기도 하였다한다.
이어 창당 다음날인 18일 가회동 김찬의 집에서는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다.
나중에 알려진 바이지만 그대 창당당시의 조선공산당의 당칙은 전문95개조로 되어있었다. 이 당칙에서는 당의 최고기관은 당대회로 되어있고 중앙집행위원회는 당 대회에서 선거한 중앙집행위원으로 구성하며 당의 기본조직은「야채이카」(세포)로 되어있다.
또 당원은 정당 회와 후보 당 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후보기간에 있어서는 3개월 이상, 노동 및 타인의 노력을 착취하지 않은 소 공업 자는 6개월 이상, 사무원 기타는 1개년 이상으로 되어 있다. 또 당 재정은 당원의 수입금 중 3%을 의무 금으로 떼기로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소위 기본조직(야체이카)은 공장·농촌·학교·군대·관청 등의 기본 회에 당원3명 이상으로 된「야체이카」를 두고, 군무부가 이를 감독하고 교양 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공산주의자들의 하는 짓이란 게 그때부터 조직침투 술을 배워왔던가 싶어 보였다. 그 당시「야체이카」의 인원수는 3인 이상으로 하되「러시아」는 20인 이하, 일본은 10인 이하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일경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7인 이하로 두었다.
조선공산당은 결성직후 국제 공산당의 공인을 받기 위해 조동고를, 공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봉암「모스크바」에 보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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