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의 3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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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로 54번째 맞는 3·1절. 해마다3월1일이되면그옛날 상해 삼·일당에서 조국을 뺏긴 동포들이 한자리에모여 축하 기념식을 갖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기미만세 3년뒤인 22년 여름 상해에 건너가 이듬해부터 10년동안 (32년까지) 이 기념식에 참석했었다.
삼·일당은 불조계의 중화장로교회 예배당으로3백명남짓을 수용할수 있는 낡은교회. 여백린장군·김규식박사·김구선생 (당시 임정경무부장) ·여연형씨를 비롯한 요인들과 우리교민들이 주일마다 예배를 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도산 안창호, 「상연수」의 작가 심훈등이 우국열변을 터뜨리기도한 민족혼의 구심점이었다.
식은 불조계구석구석에 박혀있는 임정각료·의정원대표등항일·독립투사들과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면서 막을 올렸다.
3·1운동경과 보고·축사·격려사·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지는 식전은 엄숙 바로 그것. 독립쟁취의 결의를 다지고 막판에 『대한독립만세!』 를 의칠때면 청년들의 전의는 하늘을 찔렀다.
우리들 몇여명의 젊은이들은 미리 전세를 내놓은 「택시」에 우르르 분승, 태극기와 『타도 강도일본제국주의』 라고 쏜 「플래카드」 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첫 목표는 일본영사관. 황포탄과「가든·브리지」를 건너 영사관정문에 당도, 한차례 목이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친다. 다음은 방향을 일인거류지구로돌려『내로라』며 오송노와 북서천일대의 대로를 「퍼레이드」, 압제의 설움을 실컷 풀었다.
영사관 이웃인 미대사관직원들은 이때 우리들을 박수로환영해주었으며 연도의 중국인들은 『마다오 챵뚜 르번 떠구으주이!』라고 한자로 쏜 우리의「플래카드」를 따라 외치면서 응원을 보내줬다.
워낙 서슬이 시퍼렇기때문에 일영사관과 주민들은 쥐죽운듯이 고요해 정말 통쾌한 하루였다 이같은 행사는 32년까지 해마다 계속됐다.
처음 건너 갔을때나는 10대 애숭이. 이국의 하늘아래서 독립을 부르짖던 그때의 감동은 어린 가슴을 터지게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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