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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외동딸 금송이 살아 있었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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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02년 10월 26일 북한의 고위 경제시찰단으로 남한을 찾은 장성택 당시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가운데). 박남기 북측 시찰단장(오른쪽·2010년 처형)이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김재철 한국무역협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북한의 시찰단 일행은 당시 8박 9일 일정으로 머물렀다. [중앙포토]

“장금송이 살아 있었다면 장성택이 처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북한의 로열패밀리 분석을 전담했던 전직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장금송은 프랑스 유학 중이던 2006년 8월 자살한 장성택의 외동딸이다. 이 당국자는 16일 “김경희(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고모)와 장성택은 오랜 기간 별거생활을 해 사실상 이혼한 사이나 다름없었지만 장금송이 살아 있었을 땐 이 둘을 이어주는 끈이었다”고 말했다. 장성택의 여성 편력으로 불화를 겪는 와중에서도 금송을 매개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 당국자는 그러면서 “장금송이 자살한 이후 장성택 부부가 딸이 사망한 이유를 놓고 다툼을 벌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며 “금송이 살아 있었다면 장성택이 최소한의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처형이라는 비참한 지경에 몰리기 전 엄마(김경희)나 사촌동생(김정은)에게 부탁해 구원을 요청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금송은 29세에 자살할 때까지 오랜 기간 프랑스에서 생활해 왔다. 대학에 진학할 경우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고등학교를 두 번 다녔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은 “장금송은 북한에서 함께 나온 고위층 여성과 함께 생활했고,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남성도 있었다”며 “장금송이 이 남성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있은 뒤 자살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딸이 혼자 유학생활 하는 것을 불안해 했던 장성택 부부가 김일성종합대 불어과를 졸업한 김옥경이란 여성과 남성 경호원 1명을 함께 생활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송이 경호원과 연애를 하다 발각됐고, 이를 반대한 부모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자 자살을 택했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군부 내에서 입지를 다졌던 큰형(장성우 대장, 2009년 8월 사망)과 작은형(장성길 중장, 2006년 7월 사망)의 죽음도 장성택의 몰락을 불러온 요인으로 꼽힌다. 북한이 지난 13일 발표한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 판결문은 “(장성택이) 최근에 임명된 군대 간부들은 잘 몰라도 이전 시기 임명된 군대 간부들과는 면목(안면)이 있다”고 밝혔다. 형들의 죽음 이후 장성택의 군부 내 영향력이 사라지게 됐다는 의미다. 정부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혈연도, 군부 내 힘도 사라진 상황에서 장성택 처형으로 장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나게 됐다”고 말했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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