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한 장에 … 대학가 이념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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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경대 주변에 대자보 30여 장이 붙어 있다. 지난 10일 이 학교 경영대 주현우씨가 ‘안녕들 하십니까’ 제목의 대자보를 붙인 이후 일주일간 이에 응답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이어지고 있다. [강정현 기자]

‘안녕들 하십니까.’ 이 평범한 인사말이 우리 사회를 뜨거운 논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발단은 한 대학교에 붙은 대자보였다. 지난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주현우(27)씨는 교내 게시판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 2장을 붙였다. 철도 민영화 등 최근 사회 문제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씨의 대자보는 이렇게 시작된다.

 ‘불과 하루 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 해제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하지 않겠다던 그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징계라니….’

 주씨는 대자보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등 최근 사회 이슈를 거론하며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낼 것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 없으신가, 혹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이 대자보는 입소문을 타고 다른 대학으로 확산됐다. 연세대·서강대·상명대·성균관대·부산대·제주대 등 전국 대학교 게시판에 주씨의 대자보에 대한 응답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16일 현재 전국 60여 개 대학교에 주씨의 대자보와 유사한 내용의 대자보 수백 장이 게시된 상태다.

 실제 이날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경대 후문 게시판엔 30여 장의 관련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주씨의 대자보 오른쪽으로 ‘안녕할 리가 없잖습니까’ 등의 제목이 붙은 대자보가 줄지어 게시된 모습이었다. 고려대 국문학과 김동현(25)씨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나중에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주씨를 비롯한 대자보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중문 과 강동완(24)씨는 “정부 정책에 반대 의견만 내놓아도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던 대학생들이 억눌려 있던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교생마저 … 16일 전북 군산여고 학내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학교는 이날 오전 8시쯤 해당 대자보를 철거했다. [사진 페이스북 캡처]

 ◆‘안녕’ 이데올로기 논쟁=하지만 대학가에선 ‘안녕들 하십니까’로 대표되는 대자보 행렬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안녕’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진보 성향의 대학생과 보수 성향의 대학생이 이데올로기 논쟁을 하듯 서로 다른 해석과 의견을 내놓고 있다. 지난 15일 대구 경북대 캠퍼스엔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경북대 경영학부 09학번 박모씨는 이 대자보를 통해 철도노조 파업 지지 등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대자보 열풍을 비판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깨어 있는 대학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철도노조 파업을 반대하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면 깨어 있지 못한 대학생 취급을 받습니다. (…) 소위 깨어 있는 대학생들이 진정 노동자를 생각한다면 귀족노조를 편들거나 불순한 단체에 휩쓸려 데모할 생각부터 하지 말고, 당장 학교로 달려가 교정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청소부 어머님들의 어깨나 주물러 주십시오.’

 실제로 대학가에선 박씨처럼 캠퍼스를 뒤덮은 대자보 행렬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대학생들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었다.

 연세대 경영학과 A씨(22)는 “한국 경제 전반을 생각하면 철도 민영화를 검토할 수도 있다고 본다. 선동할 것이 아니라 생산적으로 토론해볼 문제 ”라고 의견을 밝혔다. 고려대 공대 B씨(25)도 “철도 민영화는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다. 어떤 게 진실인지 공부를 하고 대자보를 붙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가 대자보 행렬은 진보·보수 세력 간 갈등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보수 커뮤니티 ‘일베’의 일부 회원은 대학가에 붙은 대자보를 찢은 ‘인증샷’을 게시판에 올려 논란에 휩싸였다. 또 최초로 대자보를 게시한 주현우씨가 노동당(옛 진보신당) 당원이라는 사실도 논란을 빚었다. 주씨는 지난 2월 당시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 서울 지역 대의원에 당선된 뒤 당 홈페이지에 당선인사를 남기는 등 여러 건의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순수한 대학생 입장으로 대자보를 쓴 게 아니라 노동당 차원의 의견을 밝힌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주씨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특정 정파나 단체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올린 글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고등학교·해외로도 확산=대자보 행렬은 고등학교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날 오전 전북 군산여고에는 ‘고등학교 선배님들 학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와 쪽지가 각각 붙었다. 1학년 채모양은 “3·1운동도 광주학생운동도 모두 학생이 주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일어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경기·경북의 일부 고등학교에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게시됐다.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미국 UC버클리에 재학 중인 신은재·박무영씨는 지난 13일 캠퍼스 내 게시판에 ‘저도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였다.

글=정강현·민경원·이유정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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