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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지원 작전 (8)|공병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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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49년 종래의 보병 여단들이 사단으로 승격되자 그해 5월부터 9월 사이에 7개 사단 공병 대대가 창설됐다.
전투 공병으로서의 사단 공병 대대는 보병 진격에 앞서 지뢰를 제거하고 가교를 놓는 등 선두에 서서 가장 위험한 일들을 독차지해서 수행하고도 전공을 따질 때는 빛을 못 보게 마련이다.
또 후퇴 시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적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한 장애물을 설치하고 교량을 폭파하는 등 일종의 후퇴 엄호의 임무도 수행하는 것이다.
개전 초기에 사단 공병들은 거의 보병과 똑같이 전투 요원으로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일선에서 싸웠고 전선이 정비됐을 때도 사단공병은 전황이 위급하면 보병의 예비대 격으로 전투에 투입되곤 했다.
사단 공병 대대를 중심으로 한 공병 부대들이 사선 일대와 서울 공방전에서 소모한 주요 폭약의 수량은 폭약 2만9천7백 「파운드」, 대전차 지뢰 3백60개, 도폭 수 4천「피트」, 판철선 3「트럭」, 마대 3만5천장 등이었으며 서울 철수 전야에는 도처에서 출몰하는 적전 차에 비장한 육탄 돌격을 감행, 공산군의 진격을 최후까지 저지하려 했다.

<초기엔 소총 들고 전투에 참가>
이 같은 폭약 소모량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공병들이 빈약한 장비와 물자에도 불구하고 적전 차의 침공 저지와 교량·도로·대화구 등의 폭파 작업을 무수히 실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전 초 공병들이 소모한 주요 기자재는 거의가 폭약과 대전차 지뢰였는데 재고가 바닥이 날 즈음 6월30일부터 이틀 동안 공수돼 온 9백8개의 지뢰를 제1공병단 창고 중대가 수령해 다가 보급해 줌으로써 각 사단 공병대는 작전을 계속했다.
전선이 대전으로 내리 밀리면서 일부 사단 공병 대대는 사단과 더불어 없어지기도 했고 공병 학교는 해체된 후 수도 사단과 2사단으로 편입됐다.
그러면 당시 사단 공병 대대장들로부터 6·25 초반의 공병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박기석씨 (당시 제3사단 공병 대대장·대위=예비역 육군 준장·현 한국 도로 공사 사장·45) <6·25 당시 사단 공병은 1개 대대의 병력이 5백50명 정도로 7개 사단에 4천명 가까이 있었읍니다.
사단 창설 이전에는 각 보병 연대에 건축 장교가 한 명씩 배치돼 있어 보병 사병들을 데리고 사격 「타기트」나 세우고 막사 건축이나 하는 정도였어요.
또 당시 보급과 정비를 주로 하는 부평 제1공병단에 「그레이더」가 몇 대 있었는데 국군 시가 행진 때는 이를 몰고 나와 과시 (?) 했읍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일이지요.
사단 공병 대대는 병력 수만 채운 거지 장비라는 건 거의 없었구요.
당시 우리 3사단 공병 대대의 경우 가진 장비라고는 「지프」1대, 「트럭」과 「드리쿼터」 14대 정도에 목 공도구와 약간의 폭약이 있을 뿐 중장비는 전무였읍니다.
그러니까 6·25 전반기의 공병은 한마디로 보병 전투를 주로 했고 α정도의 공병 역할을 했을 뿐인 전투 공병이었고 후반에 들어서면서야 장비와 체제를 제대로 갖추어 완전한 공병 임무를 수행한 겁니다.
사실 초기에는 전황과 장비나 자재 등으로 보아 우선 소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6월25일 저녁 수도 경비사에 배당 명령을 받고 대구에서 부대를 지휘해 서울로 올라 왔읍니다. 당시 우리 3사단 공병 대대는 좀 우수 부대라는 평을 받고 있었는데 아마 그래서 이렇게 우선적으로 차출됐던 모양입니다. 대원 5백50명과 일체의 장비를 대차에 싣고 26일 아침 용산 역에 도착, 퇴계원 쪽으로 배치 됐읍니다. 이날 밤까지 포진을 완료하고 여기서 이틀 동안 보병전투를 했는데 한강교 폭파도 모르고 28일 새벽 후퇴를 해서 수도 경비사 본부로 왔더니 아무도 없더군요.
우리 공병대 대는 편제를 완전히 유지하며 질서 정연하게 삼각지까지 나왔다가 서빙고 쪽으로 올라가 도강 했읍니다.

<한강교 폭파, 공병까지도 몰라>
정말 공병이 한강교 폭파도 몰랐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 대해서는 아주 송구스럽더군요.
우리는 공병의 기술을 발휘해 급조한 뗏목과 사병들이 수영으로 건너가 끌어온 나룻배로 차량 15대까지 무사히 도강, 완전 무장을 갖추고 편제를 유지해 시흥으로 후퇴했다가 29일 한강 제방에 다시 배치됐읍니다.
수원선으로 후퇴하자 군 수뇌부는 영등포에 결사대를 보내기로 하고 이때까지 편제가 가장 건재한 우리 3사단 공병 대대에서 1개 중대를 차출합디다.
서울에 올라왔던 우리 1개 증대는 2일만에 두명의 희생자를 내고 소제 권총 2정과 따발총 등을 노획해 가지고 돌아 왔데요. 나는 이들 결사 대원들이 떠날 때 술을 한잔씩 권하고, 생이별이 될지 모른다면서 붙들고 울었었는데 희생은 예상보다 적은 편이었어요.
우리 부대는 청주를 거쳐 대구로 후퇴해서야 비로소 제3사단으로 원대 복귀했읍니다. 우리는 대구에서 부대를 잠시 정비한 후 영덕·포항 전투에 투입됐는데 이때도 보병 전투를 주로 했어요.
나는 영덕에서 양쪽 다리를 부상당해 20일 동안 입원했다가 실도 채 안 뽑은 채 퇴원해서 부대를 계속 지휘, 목발을 짚고 원산까지 진격해 올라 갔읍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6번을 밀고 밀린 포항 전투에서 우리 공병 대대는 아군이 강을 건널 때마다 부교를 놓아뒀는데 정말 혼났어요. 늘 야암을 타고 「드럼」통을 「와이어」줄로 묶어 밀어내 대안까지 닿게 해서 각 연대 정면마다 부교를 하나씩 가설해 준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공병들은 포탄이 오가는 아군과 적진지 사이에 끼여 곡예를 부린 셈이지요.
이때부터 우리는 보병 연대의 진지 구축을 도와주고 방어선에 지뢰를 매설하는 등 공병 본연의 일부 임무도 수행하기 시작했읍니다.
전투 공병으로서의 사단 공병은 후방의 건설 공병과도 달리 제일 위험한 병과 병인데 특히 북진 때는 동해안의 도로를 확장, 정비하느라고 애를 먹었어요.
어느 의미에서는 38선을 제일 먼저 넘는 것도 우리 공병이었다고 할 수 있읍니다.
지도 보급 문제에도 애를 많이 먹었는데 하루에 1백여리씩 진격해 나가는 보병 부대들한테 지도가 부족해 일일이 현지의 지도를 그려 보급해야 했어요. 시간이 없을 때는 5만분의 1 지도를 등사판에다 밀어다 그대로 주기도 했지요.
우리 공병들은 선두에서 지뢰를 제거해 나가다 적이 버리고 간 「탱크」들을 많이 폭파시켰는데 뒤따라오던 보병 부대들이 이것을 가지고 서로 전과 다툼을 하기도 하데요.>
▲서윤택씨 (당시 제2사단 공병 대대장·대위=예비역 육군 소장·현 원호처 차장·52) <48년11월 김포에 창설됐던 공병 학교는 많은 기간 요원을 배출해서 사단 공병대 발족에 큰 공헌을 했읍니다.
2사단 공병대 대장이었던 나는 공병학교 고등 군사반에서 교육을 받던 중 6·25를 당했읍니다.
6월25일 김묵 소령과 함께 적의 공습을 피해 가며 김포 학교에 있다가 밤 12시 용산역으로 나가 대전에서 올라오는 우리 2사단과 합류, 부대 대장으로부터 열차 내에서 지휘권을 인계 받고 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어요.

<적 공세 늦게 대인 지뢰 매설도>
26일 새벽 의정부에 도착한 우리 2사단 공병 부대는 즉각 「드리쿼터」 1대분의 대인 지뢰·대전차 지뢰들을 매설했는데 적 「게릴라」들이 피난민 대열에 끼여 들어와 매설 지점을 봐 두었다가 연락해 주는 바람에 적전 차들은 그 기점에 오면 딱 멈추고 지뢰를 파낸 후 그대로 내려와 버리데요. 정말 울분이 터집디다. 26일 밤 창동서부터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우리 2사단을 합동 지휘하데요.
27일 새벽 2사단과 7사단 공병 대대에서 1개 소대씩을 차출, 대전차 육박 특공대를 편성했는데 6·25날 결혼했던 7사단 공병 대대장이 적에 투강한 사고가 발생해 새벽 2시의 출격에 차질을 가져왔고 뒤늦게 우리 2사단 김영복 소위가 인솔해 들어갔다가 그만 날이 밝는 바람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채 실패, 김 소위를 비롯한 사병 다수가 전사하고 말았어요.
나는 27일 밤에는 고대 도서실에 대대 CP를 정하고 사수전을 벌였는데 28일 아침 주위가 조용하기에 부대 대장한테 지휘를 잠시 맡기고 적정을 살피러 뒷산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와 보니 부대와 차량이 모두 후퇴하고 장교 1명과 사병 18명만 남아 있데요.
부대대장은 한강교 폭파를 알고 재빨리 부대를 끌고 나갔더군요.
나는 남아 있는 대원들과 함께 완전 무장을 하고 전투대형을 취한 채 성동역∼육본∼잠실리로 나가 현재 제3한강교 자리로 도강했읍니다. 잠실리에 나오니 사복으로 갈아입은 국군장교들이 우리들을 보고 모두 놀랍디다.
우리는 도보로 과천∼안양을 거쳐 수원에서 일부 도착해 있는 대원들과 합류, 부대를 정비하고 폭약과 지뢰 등을 조금씩 공급받았어요.
나는 징발한 민간 「트럭」에 「다이너마이트」 기타 기자재를 싣고 부대를 직접 지휘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한강 방어전에 임했읍니다.

<보병과 손발 안 맞아 요새 놓쳐>
여기서는 임선하 대령이 2사단과 7사단을 통합 지휘했는데 우리 공병 부대는 과천에 포진, 지연 작전을 전개했어요.
이 저항선이 무너지면서 우리는 산을 타고 오산으로 각개 후퇴를 했는데 이때 희생자가 많이 났읍니다. 공주를 거쳐 충북 증평으로 올라가 청주∼보은∼황간 사이의 도로와 교량들을 폭파하면서 금강 지연 작전에 참가했읍니다.
우리로서는 개전 이래 처음으로 공병 임무를 수행한 건데 청주 서쪽 피발령 전투에서는 공병과 보병이 손발이 안 맞아 다시없는 공병작전의 요기지를 놓쳐 버리고 말았어요.
미군 당국은 피발령에서 우리 공병이 적어도 적의 진격을 1주일 정도는 지연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보병 연대장이 기습을 당해 후퇴하면서 도로의 대화구를 폭파시키지 않고 오는 바람에 단 2일만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 이유가 걸작이었는데 연대장 왈 『우리가 곧 진격을 할텐데 도로를 끊어 놓으면 안된다』는 거였어요, 이때 우리 공병은 보병 1개 연대에 1개 소대씩 배치해 놨었어요.
이한림 사단장과 나는 고개 이쪽에 서 있다가 적의 총성을 들었는데 이 대령은 일선 연대와 전화가 안 통하자 수화기를 내던지고 후퇴해 버리더군요.
몇 시간 뒤 최창식 공병감이 뛰어 오더니 미군들한테 망신이라면서 연대장을 총살한다고 까지 화를 내데요.>
◆주요일지 (1952년10월31일∼11월3일)
※10월31일 ▲거제도의 4개 수용소에서 포로 폭동, 1백78명 부상 ▲일본 어부 36명을 송환 ▲「파라우다」지 동서 공존 주장
※11월1일 ▲공군 참모 총장에 최용덕 소장 임명 ▲「유엔」총회, 한국 문제 토의 계속
※2일 ▲「유엔」총회 불 대표, 포로의 자유 송환 강조 연설
※3일 ▲충주군 청사, 공비 방화로 소실
◆정정=본 연재 제4백21회 본문 기사 중 「최 대위」는 「작전 장교 이 대위」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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