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준비해 놓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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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23면

한때 세계 시장의 50%를 차지했던 휴대전화의 절대 강자 노키아는 이제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팔리는 처지가 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 노키아와 더불어 휴대전화 시장을 호령했던 모토로라는 또 어떤가? 두께 1.3㎝의 초슬림 디자인으로 1억3000만 대가 팔렸던 ‘레이저’ 신화의 주인공인 이 회사 역시 이미 두 해 전 125억 달러에 구글에 매각됐다. 기업용 스마트폰 1위였던 블랙베리를 만든 림(Rim) 역시 지금은 매물로 나와 있는 상태다. 물밑 매각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팔리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이 들려주는 ‘경영의 한 수’ <10>

대만의 HTC는 이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고전하기는 마찬가지다. HTC는 3분기에 상장 이후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냈다. HTC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스마트폰에 처음으로 적용해 주목받았던 기업이다. 또한 윈도 모바일을 MS보다 잘 다룬다는 기술력을 인정받던 업체였다. 불과 2년 전인 2011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나 애플과 견줄 만한 경쟁력 있는 업체로 스마트폰 시장의 맹주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지난해 스마트폰 점유율이 5%대로 떨어지더니 올해는 2% 로 주저앉아 ‘글로벌 톱 5’에서 밀려났다. 피처폰 시장을 호령했던 LG전자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서 3위로 도약하면서 부활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누가 애플에 맞설 것인가
승자와 패자를 가른 결정적인 요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스마트폰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은 애플로부터 시작됐다. 애플은 2007년 iOS라는 자체 운영체계에 기반한 아이튠스 생태계 모델을 처음 제시한다.

하지만 정작 최초의 스마트폰은 애플 것이 아니었다. 다소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널리 인정받는 최초의 스마트폰을 선보인 것은 IBM이었다. 무려 20년 전인 1993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말이 없었고 IBM은 ‘사이먼 퍼스널 커뮤니케이터’라는 이름으로 혁신적인 기기를 선보였다. 사이먼은 e메일, 주소록, 계산기, 달력, 게임 등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스마트폰이 가진 핵심 기능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노키아 역시 일찌감치 스마트폰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이미 90년대부터 휴대전화가 단순한 전화통화 수단 이상으로 확장될 것으로 보고 모바일 e메일, 인터넷, 터치 스크린, 무선 네트워크, 지도 정보 업체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었다.

하지만 과실을 딴 것은 독자적인 생태계를 통해 차별화된 사업 모델을 들고 나온 애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iOS를 사용할 수 없는 경쟁사들은 고민에 빠진다. 애플에 맞서려면 또 다른 콘텐트 생태계의 기반이 가능한 제2의 스마트폰 운영체계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경쟁 운영체계 중에서 iOS만큼 완성된 것이 아직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한시바삐 애플의 독주를 막아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어 마음만 급해졌다. 애플의 사례에서 보았듯, 스마트폰의 핵심은 기기의 고급 사양이나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진화하면서 무한 확장해 가는 콘텐트 생태계였기 때문이다. 콘텐트 공급자나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은 이미 애플에 ‘매여 있는(lock in)’ 상황이었다. 냉정히 따져 볼 때 애플 말고 가능한 콘텐트 생태계는 기껏해야 한 개 정도가 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그 남은 한 개의 가능성에 사활을 걸기 시작한다. 있는 역량을 다 쏟아부어 애플의 대항마가 될 것이라 생각한 운영체계에 운명을 걸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노키아에는 심비안이었고, MS와 림에는 윈도 모바일과 블랙베리OS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 생태계를 창조하지 않은 휴대전화 메이커 삼성전자가 선택한 길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것 같은 다른 회사들의 결론과는 사뭇 달랐다. 될성부른 것을 정해 ‘올인’하는 대신 어떤 운영체계가 살아남더라도 이에 맞추는 전략이었다. 심비안, 안드로이드, 블랙베리, 윈도 모바일 같은 모든 운영체계를 지원하는 휴대전화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운 것이다. ‘처음부터 네 편 내편은 없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 전략이다.

최선의 선택이 성공을 보장 못하는 시대
이런 선택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삼성은 이를 위해 공격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과 콘텐트 생태계를 운영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해 나갔다. 또 상황을 봐가며 그때그때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나갔다. 강력한 오너십을 기반으로 한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 문화가 강점으로 작용했다. 최고 경영진의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야근을 꺼리지 않고 휴가도 반납하는 한국식 직장문화와 ‘빨리빨리’ 문화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윤곽이 드러났다. 심비안도, 블랙베리도, 윈도 모바일도 아닌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애플 iOS에 맞설 유일한 가능성이 된 것이다. 막상 안드로이드로 대상이 좁혀지자 애플의 대항마를 찾던 통신사와 유통업체들은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 지원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생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휴대전화 제조업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들은 전략적으로 삼성에 각종 지원을 몰아줄 수밖에 없었다. 삼성은 초기 시장 수요를 확보하면서 소프트웨어에 추가 투자를 할 수 있었고 결국 경쟁업체와의 격차를 벌리는 선순환 구조에 진입한다.

이노베이터(혁신가)인 애플은 논외로 하고 노키아·모토로라·림과 삼성전자를 가른 결정적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시장에서 오늘날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이유를 딱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요소 중에서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적응력’(adaptability)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 경쟁이 불붙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는 한마디로 ‘불확실성의 시대’다.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을 때 필요한 핵심 경쟁력이 바로 적응력이다. 기업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이른바 ‘LTE급’으로 급변하는 환경에서, 기업 경영자는 제한적이더라도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 기반해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한다. 변동성이 지금보다는 덜했던 과거에는 최선의 전략을 수립한 뒤 잘 짜인 로드맵에 따라 이를 차근차근 실행해 가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이었다.

불확실성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적응력
그러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에선 최선의 선택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대안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재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탄력적인 경영 역량이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공 방정식은 시대마다 다르다. 다시 고사성어로 돌아간다면, 이 시대 흐름에 맞춘 경쟁력의 정의는 ‘교토삼굴(狡兎三窟: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준비해 놓는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 경쟁은 점차 막을 내리고 있다. 전 세계 하이테크 업체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대체할 ‘차세대 대박’ 상품(Next Big Thing)을 찾아내는 데 동분서주한다. 스마트 시계와 같은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불확실성 시대에 감히 한 가지 미래를 장담한다면 차세대 전쟁에서의 승자 역시 이를 처음 만들어내는 사업자보다는 적응력이 뛰어난 사업자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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