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대해부] 5. 기금운용 이대론 안된다(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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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투자계획안에 대해 위원님들 전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루 같이 자면서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이태복 보건복지부장관)

"조찬회의도 매번 성원이 안되는데 하루 갖고 되겠습니까. 기금운용위원회가 전문성을 갖고 의사결정을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장)

지난해 5월 7일 서울 팔레스호텔. 강봉균 원장은 기금운용위원회의 부실 운영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날 회의는 국민연금 기금의 중장기 운용방안을 결정하는 자리. 전체 21명의 위원 중 11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또 참석자 중 다섯명은 회의 시간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날만 그런 게 아니다. 한 해에 4~5차례 회의가 열리지만 출석률은 매우 저조하다. 참석자 중에서도 상당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다. 연금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연금기금은 지난 1월 말 현재 94조원. 올해 1백조원을 넘는다. 연간 예산에 버금가는 기금운용 방안이 이런 식으로 결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연금기금은 2033년에 그 때 돈으로 환산해 1천6백조원이 된다.

얼마나 돈을 잘 굴리느냐에 따라 수백조원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금운용위원회의 부실 운영에다 정책 부재, 전문인력 부족이 겹쳐 국민들의 불안은 가실 줄 모르고 있다.

◆비전문가가 방향 결정=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장관을 위원장으로 직장가입자.지역가입자.시민단체.소비자단체.정부 등 각계 대표가 참여하는 연기금 운용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운용실적 심사. 투자계획.중장기 전략 등을 결정한다.

당연히 전문가들로 꽉 차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음식업중앙회나 소비자단체 대표가 들어 있는가 하면 민주노총.한국노총 등도 가입자 대표로 포함된다. 노동부.농림부의 차관도 참여한다.

출석률도 절반을 약간 웃돈다. 지난해 다섯번의 회의 중 가장 많이 참석한 경우가 14명이었다. 심지어 일부 위원은 한 차례도 출석하지 않았다.

한 위원은 "국민연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며 "일부는 엉뚱한 소리를 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증시 부양에 들러리=지난달 14일 열린 긴급 경제장관 간담회는 올해 연기금 주식투자 예정액의 조기 집행을 유도하기로 했다. 추락하는 증시를 받쳐보자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간담회 직후부터 3월 7일까지 3천7백여억원을 증시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11일 종합주가지수는 간담회 직전보다 7.5%나 하락했다.

지난해 4월에도 주가가 700포인트대로 내려앉자 정부는 국민연금 주식투자분 6천억원을 조기투입키로 유도했다. 말이 유도이지 압력이나 다름없다. 투자손실에 대한 책임소재도 애매하다.

◆채권투자에만 매달려=지난해 국민연금 적립금 가운데 금융자산 62조원 중 채권투자액이 56조원으로 90.9%에 달했다. 문제는 채권금리가 5% 이하로 떨어진 데다 안전한 국공채 발행물량도 한정돼 있어 살 만한 채권이 없다는 것이다.

또 시장 변동에 따라 채권을 사고파는 게 정석인데 그러지도 못한다.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연기금이 채권을 팔 때마다 채권시장이 출렁일 수 있어 거의 만기까지 보유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운용계획을 짤 때부터 보건복지부를 비롯해 재경부.기획예산처의 '훈수'가 들어온다. 1년 단위로 투자실적을 평가하고 심하면 분기별로 투자결과를 따지기 때문에 장기 운용전략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운용전략 짜야=기금운용위를 각계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전문가들로 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복지경제연구원 정경배 원장은 "금융통화위원회처럼 각계가 추천하는 연금운용 전문가가 위원으로 참여하도록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연금기금의 채권 의존도를 줄이고 주식.부동산으로 투자를 다변화하되 정부의 영향을 배제한 독립적인 판단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증권연구원 고광수 박사는 "연금기금이 정부방침에 밀려 주식투자를 확대하기보다는 장기적 투자원칙을 명문화한 지침서를 만들어 그에 따라 투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물론 이런 대안이 현실화하려면 무엇보다 정부의 발상전환과 개혁의지가 필요하다. 방법은 많은데 무엇을 선택해 어떻게 수술할지는 역시 최고 정책결정자의 몫으로 남는다는 얘기다.

<특별취재팀>
신성식.정철근.김준현.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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