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춘계공세와「명예로운 종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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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차례>
①미국의 개입
②확전의 불길
③「게릴라」전과 장군
④공중전 논쟁
⑤전쟁과 정치주역들
⑥춘계공세와「명예로운 종전」

<조지·맥아더 기>
【로스앤젤레스·타임스=본지특약】미군대변인들은 월맹이 비무장지대나 중부고원지대에 단기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콘툼」과 같은 성도는 일시적으로 함락되어도 그것은 단 며칠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노이」는 점령지역을 유지할 힘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관리들이 공격이 있다면 미대통령 선거가 있기 몇 달 전이 그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브럼즈」의 오판>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부활절직전「에이브럼즈」장군은 가족과 함께「방콕」으로 휴양을 떠났고「벙커」대사도「네팔」「카트만두」로 여행길에 올랐다. 「네팔」은 국무성 직업공무원인 그의 처「캐럴·레이즈」가 주재대사로 있는 곳이다.
그 무렵 비무장지대일대에 심상치 않은 공산군의 포격이 있었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예상보다 거센 「하노이」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월맹 정치 국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지압」국방상은 공격에 15개 사단을 투입했다. 사실상 동원할 수 있는 전 병력이 총공세에 나선 셈이다. 아울러 비밀리에「병참공세」가 수반됐다. 약 8백대의 소제「탱크」, 그리고 3백 내지 4백 문의 소제 1백30mm포가 주로 휴전선을 따라 수송되어 전례에 없던 화력전의 양상을 띠었다.
미 정보관리들이 후에 종합한「하노이」의「마스터·플랜」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박격포 및「탱크」공격으로 우선「쾅트리」성을 함락시킨다. 다음 이 부대는 산악지역으로부터 명령을 보강 받아 월남의 서쪽옆구리를 공략,「후에」시를 점령한다. 동시에 중부고원지대의 군대가 2차 공격에서「콘툼」을 장악하고 다른 병력이 옛 해안요새인「빈딘」성을 점령한다. 그런 다음 패주하는 월남 군을 추격, 「탱크」를 앞세운 3개 사단이「안록」을 통과해서「사이공」으로 통하는 13번 공로를 물밀듯이 쳐들어가 최종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총공세는 적어도 군사적인 면에서는「하노이」에 실패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월남군의 활약도 실제로 별것이 없었다.

<월남전의「에피소드」>
그래서 미래의 군사학자들은 이 대공세를 월남전의 마지막「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예로써 설명할지 모른다.
첫째, 월맹군은「탱크」의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거의 대부분이 무모하게 낭비되었다. 단적인 예로「안록」으로 진군하던 어떤「탱크」사령관은「탱크」차 탑 위에 신나는 듯이 서서 지휘하다가 총에 맞아 즉사했다.
반면에 월남군도 자체의「탱크」2백대 이상을 잃었는데 이것은 대부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잃은 것이다.
둘째 월맹군은「안록」이 함락될 수 없게 수비가 강화된 한참 후에서야 정예부대를 대치했고, 거꾸로 월남은 형편이 아주 쉽게 호전되어도 반격·소탕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끝으로 월남 군은 10여개 중 3개 사단만이 비교적 잘 싸운 편이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형편없었다. 공식적인 미군보고에 따르면 미군「제트」기와 B52기가 없었다면「사이공」정권은 벌써 끝장났을 것임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를 굴복시킨「디엔비엔푸」에서와 같이 「지압」은 수만 명의 목숨을 걸어 미군을 망신시키고 쫓아보내려는 도박을 감행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승자와 패자의 구별은 혼미해졌다. 그 결과 다가오는 휴전과 평화협정에서 이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가 기록상으로 나타나게끔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악당과 영웅의 드라마>
『월남전』이란 역사적 현장은 크고 작은 무수한 악당들, 그리고 대부분 말없는 영웅들에 의해 엮어진「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인물을 소개하자. 1차 세계대전 당시「프랑스」해군의 영웅이었던「티드리·다르장리유」제독은 전쟁에 대한 고뇌 끝에 수도원에 들어가 버린 사람이다. 그는 2차대전이 발발,「드골」장군의 자유「프랑스」해군에서 부를 때까지 계속 수도원에서 머물렀었다.
그러나 그후「베트남」총독으로 임명된 그는「하이퐁」에 대한 포격을 명령, 6천 내지 2만 명의 월남민간인을 살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호지명과의 협상의 길을 막아버리는 죄를 범했다. 만약「드골」이 다른 사람을 임명했거나, 「다르장리유」제독이 수도원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월남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닉슨」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 그의 정책 연설에서 미국의 월남개입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 자신「아이젠하워」당시 부통령 직에 있었으므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닉슨」이「키신저」의 견해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음이 명백하다.「키신저」는 「닉슨」과 손잡기 전 한 외교정책연설에서 월남전의 시작에 대한 의문과 함께 그 종결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적이 있다.
『여하튼 우리는 월남에 발을 들여놨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명예롭게 전쟁을 끝내는 것은 세계평화를 위해 기본적인 것이다』-그는 이렇게 강조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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