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제30화 서북청년회(25)살육의 여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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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더기 학살이 교환된 영동사건은 곳곳에 살육의 여마를 몰고 왔다.
영동사건은 피차가 한차례씩 공격을 강행했었지만 결과는 좌익 측의 피해가 엄청나 그들의 판정패로 끝난「게임」.
좌익 측은 이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각처에서 살상을 서슴지 않았고 그러면 서청도 지지 않고 맞섰다.
살상의 여파는 이 같은 영동사건의 불균형이 부른 어찔 수 없는 결과였다.
그중 좌익 측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을 재연한 것이 공주사건(같은 해 4월)이었다.
사건은 계몽 강연 차 금산인도교를 건너가던 공주지부(지부장 송표석·평남)대원 20여명이 1백여 민청대원들의 기습을 받아 용승대 대원(원산)이 죽고 김병동대원(평안도·간호동서 부동산회사경영)등 6∼7명이 부상한 반면 서청 또한 반격에 나서 수명의 민청대원을 해친 백주의 혈전이었다.
공주지부 (국민회지부대·총 대원4O여명)가 선지 불과 20여 일만의 일이었다.
발촉 즉시 공주 국민교 강당에서 이북 진상폭로 강연을 가진바있는 지부는 이날 금강교 너머 한 국민학교 강당에서 임일대표가 직접 참석하는 두 번째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좌익들은 이날 지부대원 20여명이 청중들을 모으러 금강교를 넘어가는 순간 기습을 해왔다. 정확하게는 다리 한증간에 이르렀을 애였다.
갑자기 앞뒤에서 함성이 일며 좌익들이 벌떼처럼 짓쳐 나왔다. 다리 양쪽 밑에 각각 매복해 있다가 지부대원들이 한중간에 이른 순간 뛰쳐나온 것이다. 지부대원들은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좌익들은 사제 총으로 공포를 쏴 쥐 몰이하듯 지부대원들을 몰아가며 죽창과 곤봉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이날 지부가 좌익 측의 습격에 대비, 사전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다.
때가 때인 만큼(영동사건 직후)그것은 결코 소홀 할 수 없는 일.
김동희 대원(당시22세 가량·평북초산)등 3명의 경찰대를 선발, 아침 일찍 강연장주변을 살피고 오게 하기도 했다. 정찰도중 문제의 금강교를 왔다갔다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다리 밑에 매복해 있는 것을 미처 못보고 안심을 했다가 그만 기습을 당하고 만 것이다.
죽창은 키 만한 크기에 뾰족한 앞 부분을 불에 살짝 지져 칼끝처럼 만든 것.
지부대원들은 도망갈 길도 없고 선 채로 죽창 받이가 됐다.
용승대 대원이 숨진 것도 이 죽창에 왼쪽가슴을 찔렸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지부대원들이 몰 죽음을 면한 것은 때마침 나타난 후속대원 덕택이었다.
이들은 강연장 준비를 하러 뒤따라 다니다가 사건을 보게된 것.
이들은 우선 선발대의 뒤를 막고 있는 좌익들을 쳐 퇴로를 틔우는 한편 즉각 읍내 육연 연맹(지부장 염우량·국회의원역임)과 국민회(지부장 문홍범·임정요인)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섰다.
제2「라운드」는 각 우익단체의 지원으로 이쪽이 단연 우세였다.
닥치는 대로 단도를 휘두르고 곤봉을 돌렸다.
좌익은 처음엔 완강히 버텼으나 이쪽칼에 몇명이 쓰러지자 그제 서야 꽁무니를 때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떼죽음을 당할 뻔했던 금강교 사건은 이처럼 우익의 연합작전으로 간신히 수습됐다. 결과는 좌·우 양측의 희생이 수명 대1명으로 역시 서청의 판정승이었다. 좌익희생자는 경찰에서도 발표를 안 해 흐지부지됐다. 경찰이 흐지부지 한 것은 이 사건을 미리 막지 못한 책임이 그들에게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측은 용대원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공주에 은 그의 부모님(당시부산지주)들은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셨다.
통곡을 하기는커녕 『제나라 아닌 일본에 군인 나가 죽기도 했는데 공산당을 무찌르다 갔으니 원통할 것이 없다』며 『이런 불상사가 났다고 해서 사기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통일의 날까지 꾸준히 싸우라』고 오히려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의 말씀은 그 뒤 남선 파견대의 좌우명이 됐다.
서청의 희생자는 공주사건에 앞서 군산에서도 1명 있었다.
당시 27세 가량이었던 평안도출신(납북불명)김용익 대원이었다.
그때 군산지부 대원들은 국민회지부 및「아시아」병원(역전·원장 김병배)을 비롯한 유지 집에 분산 수용되고 있었다.
김 대원은 이중 「아시아」병원소속. 그는 월남전 도청서기로 근무했기 때문에 글씨도 잘 쓰고 일도 무엇이든지 잘 처리했다.
그래서 군산지부에 파견되면서 곧 지부의 살림을 맡다시피 해왔는데 이북 진상폭로 강연을 하기 위해(연사 임일대표)군산극장을 빌러 나갔다가 병원부근 고무공장(사장 박만수)의 전평 계 노동자들에게 피살당했다. 머리를 둔기로 맞아 뇌진탕으로 즉사한 것이었다.
시체가 발견된 공장 앞 골목은 「아시아」병원에서 불과 1백여m밖에 안 되는 곳. 그는 바로 지부합숙소 코밑에서 무참히 꺾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살생의 악순환 외에도 같은 4월엔 전주·남원·이리 등지서 각종 「테러」가 꼬리를 물어 남선 파견대는 편할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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