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제30화>서북청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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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동사건>
47년4월은 남선파견대가 설치된 이래 가장 다사다난한 달이었다.
영동·공주등지에서 살상사건이 교환되는가 하면 전주·이리·남원에선 대소「테러」가 연달고 있었다.
그중 최악의 사건이 영동에서 일어난 무더기 살육공방전이었다.
상대는 당시 현지주둔 국방경비대의 일부대원. 남선파견대지부(지부장 장훈종·철원) 대원10여명(명단불상)이 떼죽음을 당하고 국방경비대 측도 그 몇배의 보복을 받는등 피비린내나는 사건이었다. 쌍방피해가 적어도 30∼40명은 됐을것이다.
계곡 응달에 아직도 빙판이 희끗희끗 비치는 이른 봄 으스름 달밤에 비극의 막은 올랐다.
이날밤 국방경비대 일부대원 2백여명은 서청파견대 대원들이 잠에 떨어진 시간을 노려 합숙소(변두리 언덕에 위치)를 기습해왔다.
구구식과 삼팔식 소총으로 무장한 야습이었다.
이때 합숙소에 자고있는 대원들은 불과20여명(선발대)으로 그날낮 읍내에서 이북진상보고회를 가졌기때문에 피곤해 모두가 세상모르고 꿈길을 헤매고 있었다.
마침 변소를 가던 한 대원이 비탈길을 메우며 밀려드는 이들을 발견, 좌익의 기습임을 직감하고 대원들을 두들겨 깨우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심야의 난폭자 이들 대원들은 벌써 합숙소안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드르륵』하는 연발음과함께 대원들은 누운채로 총알받이가 됐으며 뛰쳐 나오는 동지들은 개머리판의 밥이 되어 그자리서 고꾸라졌다.
조금전까지 꿈길만이 있던 합숙소는 순식간에 비명과 신음으로 범벅이된 생지옥이 됐다.
낮의 강연회에 대한 일부 좌경대원들의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기습순간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던 몇명의 대원들이 얼마 뒤 우익단체인 태극청년회대원(대표 이준태)들을 몰고 왔을때는 경비대대윈원이 모두 물러간 뒤였다.
사신이 휩쓸고간 합숙소 방안은 처참한것도 처참했지만 새로운 공포까지 도사리고 있었다. 나등그러저 있는 대원들은 김선정(평북)등 6명뿐(모두중상), 같이 쓰러져 있어야할 10여명의 대원들이 온데간데 없이 증발한 것이다.
틀림없이 좌익들이 죽여 내버렸을 것으로 보고 밤새 변소를 비롯, 인근 야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흔적마저 찾을수없었다.
이들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이튿날 아침 영동세무서옆 목욕탕에서 였다. 10여명이 모두 빈탕속에 거꾸로 쳐박혀 있었다.
사건을 보고받은 대전파견대총본부는 이 엄청난 비극앞에 두눈이 뒤집힌채 즉각 사후조처에 착수했다.
먼저 임일대표가 「보디·가드」김원만(철원)만을 데리고 단신 영동에 내려가 경비대대장과 담판, 『범인들을 색출, 서청에 넘기라』고 강력한 요구사항을 들이댔다.
그러나 좌경인 그가 이요구를 들어줄리가 없었다. 되려 임일대표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고 『이북에서 쫓겨온 민족반역자』로 규정하는것이었다.
담판 자체가 어리석은 일. 대전총본부는 마침내 복수의칼을 치켜들었다.
당일아침 본부대원 1백여명으로 조직된 결사대는 즉각 영동으로 출동했다. 기차로 가면 경비대측이 눈치를 챌것은 뻔했다.
결사대는 옥천까지만 기차로 가고 거기서부터는 뿔뿔이 흩어진채 걸어서 들어가는 잠행을 택했다.
행색 또한 남행하는 피난민처럼 꾸미기위해 식량이 든 괴나리봇짐을 하나씩 짊어졌다. 작전은 들어맞아 농민들까지 피난민으로 알아줬다. 대원들은 올때처럼 각각 민가에 들어 밤이 깊기만을 기다렸다.
새벽2시. H「아워」인 이시간에 1백여 결사대는 봇짐속에 감추어온 손도끼를 꺼내들고 미끄러지듯 깊은 잠에 빠진 경비대를 기습했다.
먼저 무기고 경비병을 누인뒤 소총과 탄약을 모두 꺼내들고 2백여명이 잠들어 있는 막사로 접근했다.
『작전 개시!』 임일대표의 구령이 떨어지는 순간 미리 준비한 「개설린」이 뿌려지고 막사는 온통 시꺼먼 화염에 휩싸였다. 한쪽에선 총을 겨누고 다른쪽에선 불길을 뚫고 나오는 경비병을 닥치는대로 도끼로 쳤다.
합숙소습격을 재연한 보복이었으나 그 정도는 비교도 안될만큼 혹독한 것이었다.
이사건은 희생자가 워낙 컸기때문에 서청단독으로 수습할수가 없어 임일대표가 상경, 김구선생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선생이 경비대 송호성사령관에게 말을 해주어 겨우 수습됐다.
합의사항은 『피차 없었던것으로 한다』는것. 이는 김구선생이 『당초 선공을 한 경비대 일부분자에 책임이 있다』고 서청을 밀어준 덕분이었다. 그래서 이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채 묻히고 말았다.
영동경비대 자리에서는 그 뒤 불온서적이 2「트럭」분이나 나와 압수됐다.
당시 경비대에 이처럼 좌익분좌들이 침투한것은 가두에서 모병을 실시했기 때문이었으며,뒤에 나오겠지만 이사건에 자극을 받아 많은 서청대원들이 『국군도 우리가 지킨다』는 결의아래 군문을 두드리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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