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70년|그 애환을 되새겨보는 특별기획(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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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눈물겨웠던 초기「하와이」이민의 생활.
1905년 25세의 나이로 「하와이」행 이민선을 탔던 한 청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경도 길주 태생의 이 청년은 13세에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일·노 전쟁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에 돌아왔다 다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한국어 이외에 소련어·중국어·일본어를 할 수 있어, 통역과 인부감독을 했기 때문에 같은 한국이민 중에서는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청년의 생활기는 1949년 「하와이」대학사회학과에서 발간한 『「하와이」의 사회형성』(Social Process in Hawaii)란 학회지에 실렸던 것이다. 수기형식으로 옮기면 이러하다.
-나는 1878년 함경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10남매중 9번째로 태어난 나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별다른 고생없이 국민학교 6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웃들은 매우 가난해서 그들의 딸을 「러시아」나 만주로 파는 사람도 있었고 일가가 모두 만주로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뒤숭숭한 가운데 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신비의 이국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6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 나는 친구25명과 함께 집을 떠나 「러시아」로 도망갔다. 우리들은 먼저 도로공사장과 철도부설 작업장의 인부로 일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하고있던 1905년 일·노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교통이 온통 마비됐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14년간 애써 모았던 재산을 팽개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고 간신히 영국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그 배로 일본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일자리도 돈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이때 「하와이」에 가면 일터도 있고 좋은 집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러시아」에서 함께 돌아온 일행 중 13명을 모아 「하와이」이민선을 타기로 한 후 이민계약서에 서명했다.
어느 나라 여객선인지는 모르지만 온갖 고약한 냄새로 찌든 3등 선실에 실려 약3주일 항해한 끝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배속에서 구토 등으로 지칠대로 지친 일행은 선내에서 위생검사를 받은 후 곧바로 계약된 농장으로 보내졌다.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을 하는 노동은 「러시아」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일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근처에 「러시아」인 의사가 통역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러시아」·중국·일본·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통역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돼서 「러시아」인 의사가 이사를 했기 때문에 나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나의 언어실력과 경력으로 나는 인부들의 조장이 되었다.
당시 인부들은 한 「캠프」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일본인·중국인등 민족별로 동은 달랐지만 같은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했고 사생활이나 개인적인 즐거움 같은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요리만은 각 민족에 따라 취미에 맞게 해먹을 수 있었다.
「캠프」에서의 비용은 밥값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료였다.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할 경우 매달6「달러」50「센트」 의 식대만 물면 됐기 때문에 매우 싼 편이었으며 쌀 한 부대에 1「달러」 50 「센트」정도였다.
우리들은 새벽5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작업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작업은 나와 같은 「루너」(일종의 인부감독)가 맡아 그날 할당량을 무조건 끝내야했다.
작업시간은 아침6시부터 하오 4시30분까지. 점심시간 30분을 빼면 꼬박 10시간 노동이었다·
임금은 농장에 따라 지급방법이 달랐는데 한 달에 18「달러」가 평균. 나는 명색이 감독이라고 한 달에 75「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인부들의 임금은 일정치 않아 계약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나의 인부들은 대개 일당 75「센트」에서 1「달러」25「센트」까지 받았고, 여자들은 75 「센트」에서 1「달러」까지 받아 남자보다 적은 편이었다.
추수기에는 일요일과 공휴일도 없이 1주일 내내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잠을 실컷 자보고 싶다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너무도 피곤하여 일요일은 대개 낮잠으로 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후 농장일을 치우고 세탁소를 직영하여 독립을 하게되었지만 초기의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22년 내가 「오아후」로 옮겨 어린 손자들을 거느리고 유복한 생활을 누리게 됐을 때 비로소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13세의 어린 나이로 부모를 등지고 가출한지 30년이 지난 오늘 새삼 고향을 찾는다는 것이 주저되면서 그저「하와이」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조용한 여생을 보내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나의 고국에 대한 향수를 억제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요즘도 가끔 함경도 옛 고향의 추억과 부모님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하지만「하와이」에 너무 오래 살다보니 「하와이」가 나의 고향이라는 체념 비슷한 생각으로 옛 기억을 애써 지워버리곤 한다.【하와이=박정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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