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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네델란드군 대대-우방 참전부대(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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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네덜란드」군 대대는 한국전이 벌어진지 5개월만인 50년 11월 23일 부산에 도착, 예비 훈련을 받을 사이도 없이 곧 전선으로 이동하여 많은 전투를 치렀다.
「네덜란드」는 식민지로 통치하던 「인도네시아」로부터 50년 8월에 병력을 철수시켜 한국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사실상 파병이 어려운 형편이었는데도 지원병을 모집, 일개 독립대대를 파견한 것이다.
전쟁 기간동안「네덜란드」군이 벌인 큰 전투는 원주∼횡성전투 및 인제·「펀치볼」·철의 삼각지등의 전투를 들 수 있으나 이중에서도 한국참전 2개월만에 겪은 횡성전투는 가장 고전으로 영원히 잊지 않고 있다.
2월12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대대장을 비롯한 17명이 한꺼번에 전사한 것이다.
「네덜란드」군은 한국에 도착하여 미2사단 38연대에 배치된 후 대구에서 예비훈련을 막 시작 할 때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의 거의 방어선이 청천강으로부터 총 퇴각하게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훈련을 중단한 채 일선에 투입되었다.

<연 병력 4천명이 교대로 복무>
원주 탈환 작전을 끝낸 2월초「네덜란드」군은 홍천을 공격 중이던 미2사단 38연대가 횡성 북방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완전 포위되어 철수길이 막히게 되자 이를 엄호하다가 큰 피해를 냈다.
즉 이떄, 한국군으로 가장한 공산군 약1개 분대의 병력이 대대본부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대대장 이하 17명의 장병들을 한꺼번에 전사시킨 것이다.
횡성에서 원주로 이동할 때는 원주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는 만종리역 앞의 325고지를 사수, 용맹을 날리기도 했다.
이때의「네덜란드」군은 예비병력도 없는데다가 대대장마저 전사한 다음이었는데도 5일동안 고지를 뺏고 뺏기는 공방 끝에 이를 지켜 미국 및 한국정부의 표창을 받았다.「네덜란드」군은 54년 9월 철수할 때까지 연 병력 4천명이 복무했고 전쟁 중에는 1백20명이 전사,6백45명이 부상했는데 이중 약3분의2는 51년 1차 파견대가 벌인 전투에서 희생된 것이었다.
횡성읍에는 전사한 대대장 「덴· 오덴」 중령의 추념비 56년 10월 한국군 1군사서 건립) 가 세워져있고 「네덜란드」의 수도「헤이그」시에도 한국참전기념비가 건립되어있다.
다음은 장덕상 전 주불 특파원이 참전 용사들로부터 들은「네덜란드」군의 전투이야기.
▲ 「보르」씨 (당시「네덜란드」 군 대대중위· 현대령· 48) <한국에 전쟁이 벌어졌을 떄「네덜란드」국민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거의 잘 모르고 있었어요. 지도를 보고서야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더구나 한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있었어요.「네덜란드」 정부가 한국 참전을 결정하게되자 우리는 펴놓고 한국의 위치를 확인해 가면서 아주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읍니다.
나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한국에 관한 소식을 알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각국이 지원하고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어요.
50년 8월 「네덜란드」 육군은 이미 「인도네시아」로 부터 철수를 끝냈기 때문에 참전을 결정하고서도 본국정부는 어떤 방법으로 군대를 보내야 하는가의 문제로 상당히 신경을 쓴것같아요. 결국 「인도네시아」 에 남아있었던 해군 함정을 먼저 한국 해역으로 급파한 다음 육군은 별도로 지원병을 선발하여· 참전하기로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해 온 육군은 대부분 귀향해 있었기 때문에 재 소집이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러나 지원병을 모집하고 보니「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해온 군인들이 대부분이고 해군출신 예비역과 상당수의 「엔지니어」들도 포함되어 있어 보병으로서는 어려운 문제가 많았습니다.
「네덜란드」군 대대는 출발하기 전 훈련을 받았을 떄 미국무기에 대해 익숙하지 못해 애를 먹었어요. 또 당시 우리 국내에는 미국기관도 없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곧 미국무기의 조립 사용법을 익혔지요.
나는 처음에는 소대장으로 참전, 50년 11월부터 52년 9월까지 전투를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왔고 53년 4월부터는 대위가 되어 정보 장교로 다시 한국 전선에 나가 54년 9월 철수할 때까지 복무했습니다.

<중령 등 17명이 한꺼번에 전사>
대대병력으로 참전한 「네덜란드」군은 연병력 4천여명에 달하며 이중 2천 여명은 아직도 현역에 복무하고 있읍니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네델란드」군의 치열한 전투는 거의 다겪은 셈입니다.
「네덜란드」군의 가장 큰 전투는 51년 2월 횡성 전투와 같은 해 5월31일과 6월1일의 인제 전투를 들 수 있어요. 이때 「네덜란드」군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어요. 그 후에도「네덜란드」군은 철의 삼각지를 비롯,「피의 능선」· 「펀치볼」등 중동부 전선에서 싸웠지만 이때에는 전선이 이미 교착되어 있던 때라 첫번째 전투에서와 같은 희생은 없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때가 횡성 전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전에 참가한지 얼마안되어 지형·기후가 낯선데다가, 심지어는 한국군과 공산군을 잘 구별하지도 못했으니까요.
51년 2월 「네덜란드군」이 원주지구 전투를 끝내고 횡성에 도착했을 때는 적으로부터 앞뒤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어요.
2월12일에는 한국군이라고 하면서 약 1개 분대의 군인들이 우리대대에 들어왔는데 우리는 그런줄 알고 받아들였더니 이들은 공산군들이었어요. 어이없게 당한 셈이죠. 이들 오열분자들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보았어요. 초대 대대장이었던「덴·오덴」 중령을 비롯, 티멘스 대위등 17명이 한꺼번에 전사했습니다. 대대 본부가 이같은 피해를 당하고 보니 이곳에서 더이상 버틸수가 없었어요.
2월 14부터 17일까지 원주 서쪽 325고지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치열한·공방전을 벌였어 요.
4일 동안 이 고지를 서로 뺏고 뺏기는 접전을 되풀이 했읍니다.
이곳은 원주에서 약5km 떨어진 만종리역 앞의 산으로 원주의 전초 방어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전략상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곳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날에는 아군은 원주 방어선이 위태롭게 되어 수십「마일」 후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 고지를 지킨 것입니다.

<원주 방어로 미 대통령 표창도>
이무렵 미국에도 예비 병력이 없었어요. 결국 우리는 횡성에서 큰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이곳을 방어하지 않을 수가 없게된 셈이죠. 우리에게도 예비 병력이 없어 이때의 고전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첫날 적에게 고지를 뺏겼다가 다시 우리가 탈환했을 때 미군 장교 한명이 오더니『올라오는 적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 적을 죽이지 못할 때는 네가 죽든지 포로가 되는 한이 있어도 이곳에서는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서는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네덜란드」군이 단독으로 고지 쟁탈전을 벌인 것은 이때뿐이었어요. 이전투에서는 10명이 전사했어요. 이떄 우리 대대는 미국 대통령 표창을 받았읍니다.
5월에 접어들어 「네덜란드」 군은「유엔」군의 총 반격 작전에 따라 순조롭게 인제까지밀고 올라왔어요. 그러다가 5월 31일과 6윌 3일 사이에 소양강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인제 동쪽 약6백m 정도의 고지에서 적의 집중 공격을 받아 2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보았어요. 미2사단 38연대에 배속되어 매일같이 15km씩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후퇴하다가 인제에서 의외로 강한 반격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태극기 책상에 꽂아둬>
그러나 우리는 계속 밀고 올라가 7월부터는 중동부전선의 유명한 격전지인 「펀치볼」 지구전투에 참가했읍니다.
미38연대와 함께 7월26일 대우산 남쪽 1120고지를 공격했을떄는 워낙 험한 지형인데다가 적은 고지의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공격해와 12명의 사망자와 30여명의 부상자만 내고 철수했어요. 7월28일과 29일 미2사단은 대우산과 그 북쪽의 1059, 가칠봉 등 일연의고지를 점령하여 단장의 능선으로 진출했고 우리는 문등리계곡으로 나갔읍니다.
네덜란든 군은 참전 첫해인 51년에 77명이 전사했읍니다. 전쟁 기간 동안 모두 1백20명이 전사하고 6백45명이 부상했는데 첫해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죠.
나는 지금도 태극기를 내 사무실 책상 위에 꽂아놓아 한국전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한국참전 용사 중 2천여명은 아직도 현역에 복무 중에 있어 어느 부대에나 가보면 2∼3명의 한국 참전병들을 만날 수 있지요.
「네덜란드」에는 한국 참전 용사회가 아직 조직되어 있지 않아 앞으로는 이런 모임을 만들 계획입니다. 「프랑스」가 활발한 참전 용사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어 기회가 있으면「프랑스」에 가서 그들의 활동을 본받아 우리도 참전 협회를 구성할 예정입니다.
또 73년 7월27일 한국 휴전 20년을 기하여 「네덜란드」 국내에 흩어져 있는 참전 용사들을 모두 불러모아 한국전 당시 전사자들의 명복을 비는 추념식과 함께 대대적인 행사를 가질 계획입니다.
◆주요일지 (1952년9월21∼24일)
※21일 ▲공중전서 「미그」 4대 격추, 7대 파괴▲ 「불가리아」 . 간첩 협의로 40명 처형
※22일 ▲공산 포로 1명 자살▲ 「스티븐슨」 민주당 후보, 「아이크」 정책을 비난▲공화당의 「닉슨」 부통령 후보 정치 자금 문제화▲주은내, 「모스크바」 방문 마치고 귀국
※23일 ▲제주도에서 중공군 포로 49명 부상
※24일 ▲「클라크」 사령관 내한, 전선 시찰▲장택상 총리, 일본인 고시 입국 경위 담화발표 ▲자유당, 고시 사건을 갖고 장 총리 비난,
◇알림=3백76회까지 게재된 「민족의 증언」이 4권의 책에 수록 발행되어 지난 1월4일부터 시판되고 있습니다. 단위는 4권 합계 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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