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1)-김항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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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등장인물>
최덕수(65) 전직 선로보수원
김현호(43) 고향 찾아온 실업가
정여사(40) 그의 부인
창일(19) 최덕수의 아들
노인(68) 월남한 실향민
노파(63) 그의 부인
의사
간호원
운전사

<때>
1972년 가을.

<곳>
휴전선 남방 어느 역.

<무대>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자그마한 역사.
역사 가운데 출찰구의 간막이가 넘어져 잡초에 묻혔고 출찰구 뒤의 대합실, 대합실 옆 사무실 등은 깨어진 창문과 벽이 허물어져 그 안이 들여다보인다.
사무실엔 부서진 책장 의자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사무실 앞엔 반쯤 누운 시그널·체인지가 두 개 역사 앞은 좁은 플랫폼.
옛날에는 불을 밝혔을 등과 다 부서진 벤치가 나란히 플랫폼에 서있다.
철로는 무대와 관객 사이를 지난다.
-막이 오르면.
캄캄한 무대 정면으로 증기기관차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차장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뜩희뜩 빠른 속도로 무대를 어둠 속에서 건져냈단 사라지곤 한다. 기차 소리가 멀리 꼬리를 감추며 밝아지는 무대.
무대 한가운데 왼손에 개스 등을 든 최덕수가 마악 지나간 기차를 전송이라도 하듯 그런 자세로 서있다. 갑자기 생각나듯 다해진 철도원복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본다.
최적수 (혼자)가만…이자.
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며 서둘러 출찰구를 통해 사무실로 들어간다. 개스 등을 책상 위에 놓고 의자를 일으켜 세우는 최덕수. 늘 해오던 버릇대로 또 회중시계를 꺼내본다.
최덕수 (잊었던 일을 생각해내듯)
아, 아….
하며 전화통이 달린 벽쪽으로 간다. 수화기를 들려다 수화기가 잡히지 않자 문득 자기 손을 내려다본다.
전화 줄에 대롱대롱 매달러 있는 수화기.
최덕수 (화난 듯) 아니, 이건 또 어느 놈이 장난을 쳤누….
수화기를 잡아 귀에다 대고 자석식 전화기의 핸들을 돌린다.
제대로 돌지 않는 핸들을 몇번 우격다짐으로 돌리고 잠시응답 오기를 기다린다.
최덕수 (갑자기) 아, 구현, 구현? 여기 송화역입니다. 나, 최덕수요. 누구요?(약간 짜증) 여기 송학역이라니까, 지금 막 부산발 신의주행 이십칠 급행이 송학역을 통과했다구, 응…,응…, 글쎄 그렇다니까! (사이) 아, 그런데 여보, 그 왜 북행열차는 늘 정시에 우리 역을 통과하는데말요, 그 어째서 내러오는 열찬 그렇게 연착만 하는 거요? 응? 뭐라구? 크게 얘기하라구? 헛, 그러니까 그게…, 아, 구현 구현역!
응답이 없는 듯 잠깐 수화기를 들여다본다. 털컥 수화기를 건다. 그러나 고리가 부서진 전화기. 수화기는 다시 대롱대롱 전화줄 에 매달린다.
최덕수 (들아 서며)쫏, 쯧. 하옇든 구현역에 있는 놈들은 언제나 저 모양이란 말야, 하나 같이 엿먹을 녀석들만 있으니….
이때,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자를 발견하고 반가와 한다. 얼른 그 모자를 집는다.
최덕수 헛, 글쎄, 그, 이놈의 모자가 어딜 갔나했더니 헛….
모자의 먼지를 턴다. 다 해진 모자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소매로 금테를 닦아 빛을 내고 뒤집어쓰는 최덕수, 만족하다.
이때부터 좌수에서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현호와 정 여사.
현호, 말없이 이리저리 허물어진 역사를 들러본다.
최덕수는 관객에게 등을 돌린채 의자에 앉아, 책장서랍을 부지런히 여닫으며 이것저것 뒤져본다. 아무것도 쓸만한 것이 없자 호주머니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 무언가 적기 시작한다.
현호 (정여사를 보며) 어데 좀 앉지, 다리 아프지 앉지. 정 여사 아니, 괜찮아요.
현호 오늘, 너무 많이 걸었어. 저 벤치에라도 좀…(하다 다 부서져 버린 벤치를 보자, 놀란 듯 다가간다) 여보, 의자가 왜 이렇게 다 부서져 버렸지?
정여사 아이 참, 당신두…,의자라구 성할리 없잖아요.
현호 (갑자기 생각이 미친) 아…. 정 여사(다가가 위로하는) 여보, 앉지 않아도 저, 다리 아프지 않아요.
현호 (씁쓸하게 웃는) 그래…? 정 여사(가벼운 한숨) 역시 오지 않느니만 못했나 봐요.
현호 아냐, 그렇진 않아, 난 그래도…(변명하듯) 당신은 잘 모를거야. 내 이런….
정여사 알아요. 하지만 너무 변해버려서 당신, 실망하신 것 안녜요?
현호 (사이)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해!(기분을 바꾸려는) 하지만, 이렇게 플랫폼에 서있으니 마치, 아침 등교시간에 통학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기분인걸….
정여사 아무려면…(마음이 안됐다)
현호 (잠깐 생각에 잠긴 듯) 꼬박 육년을 여기서 기차를 타고 개성에 통학을 했었지. 매일아침 여기, 이렇게 서서 기차를 기다리구 말야.
정여사 여보.
이때 사무실에서 최덕수가 쓰기를 마친듯 회중시계를 꺼내보고 개스 등을 들고 출찰구로 나온다.
최덕수 (두 사람을 발견하고 큰 소리) 아, 아직 개찰도 하지 않았는데 역구내에 들어온게 누구야!
두 사람, 흠칫 놀라 돌아다본다. 개스 등을 흔들며 기세등등하게 플랫폼으로 나오는 최덕수.
현호 (놀란)아니…?
정여사 누구예요, 저 사람….
최덕수 (부지런히 걸어오며) 기차가 들어올래문 아직 한시간은 더 남았단 말야!
현호 기차라니? 구럼?(중얼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계속> 【김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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