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끝나지 않은 '조선문화말살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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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태권
광주요 대표

중국(청)은 1842년 8월 아편전쟁에서 패해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건은 일본에는 번영의 기회를, 한국에는 ‘문화의 단절’이란 수난의 역사를 출발시켰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미국·프랑스·네덜란드·영국·러시아와 서둘러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경제적 안정과 부국강병을 최우선 목표로 범국가적인 식산 흥업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어진 유신혁명은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풍요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야망과 ‘동양은 일본이 지배한다’는 침략전쟁의 계획에 따라 정치적·문화적 각성과 국민적 단결, 그리고 근대화의 기회로 만들었다.

 19세기 조선왕조는 순조·헌종·철종·고종으로 이어지면서 세도정치로 권력 쟁취에만 혈안이 돼 민생은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흥선대원군은 시대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펼쳤다.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519년의 조선왕조를 멸망시켰고 끝내는 조선문화말살정책으로 우리의 정체성마저 소멸시키려 했다.

 이렇게 생긴 100년 문화 공백은 다른 선진문화의 폭식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창조력마저 쇠퇴하게 했다. 특히 700년을 이어온 전통 술 문화가 일제의 주세령 강제집행으로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은 문화단절의 대표적 사례다. 일제는 다채롭던 우리 전통주의 생산을 금지하고 약주·탁주·소주로 규격화된 저급주만을 생산·판매토록 했다. 여기에는 술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백성들에게 싸고 저급한 술을 중독시켜 양반사회와의 갈등을 극대화하고 획일화된 저급문화를 퍼뜨려 궁극적으로 우리를 저급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저급한 술에는 자연히 저급한 음식·그릇·공예품·공간·서비스·도덕·예법·정신 등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끔찍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문화의 발전과 창조 의지를 꺾고 창씨개명을 통해 일제의 아류 국민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해 민족의 독립, 대한민국의 건국과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일제 의도대로 진화가 멈추거나 쇠퇴하면서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문제는 이를 방관해온 우리의 태도와 정신의 부재에 있다. 일제의 저급문화정책이 외식업 중 특히 한식업만은 저렴·푸짐·서민적인 소탈함이 미덕처럼 보편화돼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내수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때 가져간 우리의 소주와 도자기를 그들의 음식과 함께 발전시켜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가치 있는 고급 외식문화로 존중받게 했다. 문화주체의 정신과 통찰력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흔히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역사를 통해 오늘날 만연된 병폐의 원인을 찾고 분석하면 국가의 미래가 보인다는 의미다.

 안타까운 일은 경제가 발전하면 정치·교육·사회도 발전하게 마련인데도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제가 우리의 공동체적 도덕·윤리·가치관에 채운 문화말살이란 족쇄가 그 원인일 것이다. 한반도에 갇힌 채 끊임없이 정치적·사회적 정쟁과 일탈을 벌여온 것도 그 족쇄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제 제발 그 족쇄를 풀어 던지고 우리의 문화 정체성을 재정립하도록 하자. 비록 한 잔의 술을 마시더라도 단절된 전통을 잇고 세계적 명주로 재창조하면서 모두가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보자. 물질 속에 올바른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은 나라는 결코 부강해질 수가 없다.

조태권 광주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