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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창의적 연구 가로막는 과잉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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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

지난달 독일 베를린에서 흥미 있는 학회가 열렸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기념해 ‘Falling Walls’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학회는 학문분야 간의 장벽이나 기업과 대학 등 조직 간의 장벽을 무너뜨려 융합연구를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학자·예술가·기업가들이 한데 모여 융합연구의 성공사례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더욱 흥미 있었던 것은 학회 후 세계 각국의 연구 관련조직 대표자 30여 명이 따로 모여 과학 연구 발전에 걸림돌이 무엇인지 진솔하게 논의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영국의 수석과학자문관(Chief Scientific Adviser), 독일 헬름홀츠 연구회 이사장, 프랑스 파스퇴르 전(前) 연구소장, 미국 과학저널 사이언스 편집장과 연구중심대학 총장들이 참석했는데 여성과학자의 참여확대, 산학연 교류 활성화, 과학자와 대중의 소통 문제 등 여러 이슈가 논의되었지만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영국 과학자문관 월포트 박사(Sir Mark Walport)가 제시한 “과잉 규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주제였다.

 월포트 박사는 유럽에서는 과잉 규제가 첨단연구와 이를 이용한 산업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며, 그 예로 유전자변형식품(GMO)을 들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규제가 강해 유전자변형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이런 규제 때문에 유럽 과학자들이 작물을 획기적으로 개량하는 연구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농업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아프리카 등 식량부족 국가를 도울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묶는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월포트 박사는 과잉 규제가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규제당국의 인센티브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규제를 안 해서 생기는 피해는 직접적이고 바로 눈에 보이지만, 과잉 규제에 의해 생기는 피해는 대개 장기적이고 간접적이기 때문에 규제당국은 웬만하면 규제를 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동의하면서 지금 유럽은 GMO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과잉 규제 때문에 과학연구와 그 성과를 이용하는 산업의 발전이 저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사정은 어떠냐고 관심을 보였다. 단기간에 첨단산업을 발전시킨 한국에는 이러한 과잉 규제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그동안 과학연구나 첨단산업기술에 대한 규제가 대부분의 선진국에 비해 느슨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법령 자체가 느슨했거나, 법령은 선진국 기준에 맞추어져 있더라도 집행을 느슨하게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학교 실험실이나 산업현장의 안전관리가 허술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학교 실험실이나 산업현장에서 사고가 나면서 규정과 집행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황우석 교수 사건 이후로 배아복제 연구에 대한 규제는 매우 까다로워졌으며, 화학공장에서 몇 건의 사고가 난 이후에 산업현장에서의 감독도 강화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공계 대학원 실험실 등 일부 안전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현실을 볼 때 이러한 조치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규제가 정도를 지나쳐 월포트 박사의 견해대로 과잉 규제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일 것이다. 화학물질에 의한 사고나 국민에 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의 체계적인 관리를 한다는 이 법의 입법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그 규정이 연구현장이나 산업현장의 현실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엄격해 연구나 산업 활동을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라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다행히 정부가 산업계와 연구계의 의견을 들어 앞으로 하위법령을 조정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이 같은 과잉 규제는 처음부터 걸러졌어야 옳을 것이다. 특히 정부가 발의한 법안은 부처 간의 협의와 규제개혁위원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문제 조항들이 걸러질 가능성이 많지만, 의원입법의 경우는 이러한 장치가 없어서 과잉 규제로 갈 위험성이 더 크다는 지적이 있다.

 사실 모든 규제에는 명분이 있다. 그러나 그 규제로 얻는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클 것이 우려된다면 당연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구체적인 시행 방법에 따라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연구에 대한 규제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우리는 선진국을 따라가는 데 급급하지만, 잘못된 길까지 똑같이 답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