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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은퇴 앞두고 이유 없이 슬프다는 50대 남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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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Q 50대 후반 남성입니다. 검정 고무신이 찢어지면 바늘로 기워 신고 다녔을 만큼 어릴 적 지독하게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지금은 자수성가해 재산을 꽤 모았고 조만간 은퇴할 생각입니다. 노후 준비도, 가정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유 없이 슬프고 눈물이 날 때가 많습니다. 또 어려서 부모님과 다투던 기억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그 무섭고 공포스러웠던 기억 말입니다. 혹시 은퇴를 앞둔 우울증일까요.

A 대가족이 모여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은퇴라는 단어가 서글프지 않았습니다. 기력이 약해져 농사 업무에서 은퇴해도 삶의 지혜를 가진 집안의 정신적 리더로서의 역할은 유지했으니까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은퇴증후군이란 용어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측면에서 여러 부정적 사고와 감정을 동반합니다. 은퇴증후군의 핵심은 외로움입니다. 허무도 같이 오죠. 현대사회에서 직장인은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조직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조직과 결별하면 자신이 확 쪼그라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타이틀이 사라지고 이름 석 자만 남는 거죠.

 대부분 상실감 때문에 군중 속에서도 고독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사람은 과거에 대한 평가 역시 현재 상태를 기반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과거의 가치 있고 화려했던 삶까지 무가치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외골수 삶(Single-minded life)이란 한눈 팔지 않고 한 길로 쭉 달려가는 걸 말합니다. 부정적 뉘앙스도 있지만 사실 성실한 삶입니다. 성공한 사람치고 한 길 인생으로 달리지 않은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성실함이 은퇴 후의 외로움과 허무를 더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2002)’라는 은퇴증후군을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잭 니컬슨이 평생 한 직장에 몸담았던 주인공을 연기했죠. 영화 속에서 그가 은퇴 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은 세 가지입니다. 늙은 아내 구박하기, 예비 사위 무시하기, 그리고 하루에 77센트씩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꼬마에게 편지쓰기입니다. 편지 내용은 이런 겁니다. ‘사실은 내게도 이 나이가 늙게 느껴진다. 내가 거울을 볼 때 눈 주위 주름과 목덜미에 늘어진 살, 그리고 귀에 난 털, 발목에 정맥이 보이면 나도 이게 정말 나인지 모르겠단다. 아내와 나는 42년간 결혼생활을 했다. 요즘 매일 밤 계속 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내 옆에 자고 있는 이 늙은 할머니는 누굴까 하고 말이다’.

 또 ‘내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내 생각엔 아무것도 없구나. 전혀, 아무것도. 넌 잘 살았으면 좋겠다’란 내용도 있습니다. 은퇴 후 느끼는 서글픔과 허무가 짙게 묻어나죠. 과거가 허무하게 느껴지는 건 은퇴 후 찾아오는 외로움이 만드는 2차 합병증입니다. 외롭고 허무한데 영화에서는 아내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늙은 아내를 구박할 수조차 없으니 더 외롭습니다.

 은퇴 남편 증후군은 은퇴한 남편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은퇴한 남편 때문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는 아내의 정신신체질환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본에서 처음 보고됐는데, 일본어 진단명은 주인재택증후군(主人在宅症候群)입니다. 남편이 집에 있을 때 찾아오는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거죠. 남편 은퇴 후 찾아오는 아내의 화병이랄까요. 우울증은 마음뿐 아니라 피부발진·천식·위궤양·고혈압 같은 신체 증상도 유발하거나 악화시킵니다. 남편의 은퇴가 아내의 생명을 단축시킬 정도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역설적으로 아내를 괴롭히는 남편 역시 심리적 위기가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겠죠).

 1991년 일본에서 발표된 은퇴 남편 증후군 관련 내용을 보면 당시 일본 노년 여성 60%가 은퇴 남편 증후군을 겪는데, 이는 일본 베이비 붐 세대의 60세 은퇴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이 세대 남편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희생적으로 일했죠. 일찍 나가 늦게 귀가하는 게 보통이었고 사회적 관계도 주로 회사 사람들로 이뤄졌고요. 아내는 자기 친구와 사회관계를 형성했죠. 그러다 남편이 은퇴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을 때 아내는 타인과 사는 느낌을 받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도 일본과 유사한 사회 현상을 겪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황혼 이혼이 늘어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남편의 은퇴는 부부 모두에게 스트레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죠.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앞서 은퇴증후군의 핵심 증상이 외로움이라고 했는데요. 생존을 위한 경제적 문제를 제외하면 은퇴 후 찾아오는 외로움을 잘 다스리는지 여부가 60세 이후 행복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외로움은 우울증부터 심장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병의 위험도를 높입니다. 신체적 고통을 받을 때 활성화하는 뇌 영역이 사회적 고립감을 느낄 때도 활성화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렇게 외로움은 실질적인 통증을 줍니다.

 은퇴 후 외로움의 특효약은 무엇일까요. 사회적 유대감을 증가시키는 거겠죠. 대표적인 게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봉사자의 희열(helper’s high)이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느끼는 만족감을 말합니다. 대단한 봉사가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 하는 사소한 친절과 배려도 우리 뇌는 강한 사회적 유대감을 느낍니다. 자원봉사를 한 후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해할 뿐만 아니라 생리적 반응까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해진 거죠.

 우린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과 따뜻한 유대감을 공유하려는 욕구도 있습니다. 사연 주신 분의 눈물에는 삶의 완숙기에 찾아오는 외로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릴 적 부모의 부부싸움에서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는 건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유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와의 애착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을 상징적으로 내포하는 겁니다. 정말 그 사건 때문에 지금 눈물 흘리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제 치열한 생존보다 따뜻하게 공존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할 시기라는 걸 눈물로 알려주는 겁니다.

 직장에서의 은퇴는 있지만 심리적 은퇴는 없습니다. 나이 들면 머리 빠지고 주름이 늘고 기억력은 떨어지지만 감수성은 더 섬세해집니다. 노년에 분노와 슬픔을 더 크게 느끼는 것도 성격이 괴팍해져서가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사회관계를 따뜻하게 넓혀야 합니다.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아닌 사회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네트워크 말입니다. 젊었을 때 생존을 위해 경쟁적으로 살았다면 인생 후반부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 살아가도록 우리의 감성 프로그램이 디자인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가족과 내 주변의 사회 네트워크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게 노년의 존재 이유 아닐까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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