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우방 참전부대(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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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리틀 타이거」태국군>
태국정부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파병을 결정, 「아시아」우방으로서는 첫번째로, 「유엔」회원국으로서는 네번째로 빨리 한국에 출병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회원국들에 한국지원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하자 7월1일 태국외무부장관은 「트리부그·리」「유엔」 사무총장에게 『태국정부는 「유엔」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공산군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가능한 한 범위 안에서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회신했다.
이에 따라 태국정부는 7월20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하여 이 안건을 심의한 결과 태국은 앞으로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도 「유엔」의 결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1개 연대규모의 전투병력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고 이날로 국무회의의 통과를 보았다.
이어 21일에는 의회상하 양원의 비준을 받았고 22일에는 국왕의 승인을 얻은 다음 23일에 「유엔」사무총장에게 『태국은 4천명으로 구성된 혼성부대를 한국에 파견코자 하며 이에 따르는 세부절차는 「유엔」군 사령부와 협의코자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21년7개월간이나 계속 주둔>
그 후 태국정부는 10월16일 왕족인 「피시드·디스폰·디스준」소장을 파한부대사령관으로, 「브리본·주라자리트」대령을 연대장으로,「크리앙·크라이·아따난」중령을 제1연대장으로 각각 천명했다.
이해 11월7일 태국군 21연대1대대는 부산항에 도착, 대구에서 미국무기에 대한 훈련을 받은 다음 11월24일로 예정되어 있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총반격작전에 참가, 미제187공수연대에 편입되어 미8군 후방지역의 경계와 적패잔병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태국군은 더운 열대지방의 군대이면서도 추운 한국의 산악지대에서 6·25전쟁 3년 동안 잘 싸워 「리를 타이거」(꼬마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주둔하여 금년 6월21일 한국을 떠나기까지 21년7개월간 이 땅에 머물렀다.
태국군이 한국전 3년 동안 세운 많은 전과 중 52년11월 철원 서남쪽 「폭찹·힐」과 51년12월 「T·본·힐」에서의 전투는 그들의 용감성을 잘 나타낸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다음은 태국군의 주요전투 이야기.
「크리앙·크라이」중령이 지휘하는 태국군 21연대 1대대가 한국에 와서 미187공수부대에 배속된 후 주어진 첫 번째의 임무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총퇴각할 때 후방의 주요군사시설과 보급로를 경비하는 것이었다. 태국군 대대는 50년11월28일 평양으로부터 개성에 이르는 주요보급로 경비에 참여한 후 한성부근에서는 공산군의 유격준동을 봉쇄하는데 참가했다.
이 무렵 적의 「게릴라」활동은 대단히 활발하여 아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그 후 태국군은 「유엔」군의 철수와 발을 맞추어 12월에는 오산까지 후퇴했다.
51년1월18일까지는 평택부근 「유엔」군의 최후방어선을 맡아 지켰고 이곳에서 「터키」 여단과 교체하여 상주에서 안동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는 적「게릴라」소탕작전에 임하였다.
안동산악지대의 「게릴라」소탕작전은 공산군 제10사단이 주력부대로 이들은 태백산맥을 타고 후방 깊숙이 침투했다가 한·미 합동토벌작전에 포착되어 모두 소탕되었으며 본 연재398·399회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태국군대대가 이 같은 경비작전과 「게릴라」부대 소탕전에 참가한 후 본격적으로 전투가 참가한 것은 「유엔」군의 반격작전을 따라 51년5월27일 의정부부근 산악지대에서 벌인 전투를 들 수 있다.
이날 태국군은 의정부 북쪽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공격에 나섰다.
별로 높지 않은 이 고지는 적의 후미가 후퇴하는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포진해 있었던 관계로 비교적 저항이 강해 아군의 진격은 이곳에서 좌절된 상태에 있었다.
첫날의 태국군 공격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적은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으로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 공격에 나선 태국군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이틀째 공격을 벌인 태국군은 적의 저항이 완강한데도 불구하고 양동작전으로 적의 저항선을 분산시켜 결국은 고지를 점령하고 말았다. 첫번째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이 전투에서 태국군은 포병의 엄호포격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보병대대의 일제 돌격으로 고지의 적을 몰아내 이때부터 태국군의 용감성이 우방 각 부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태국군 대대는 1개의 은성훈장과 V자 모양의 동성훈장 4개를 받았다.
그러나 태국군이 「리를 타이거」의 용명을 얻은 것은 51년12월 금화 서북쪽「T·본·힐」지역의 전투와 52년11월 「폭찹·힐」의 전투였다.
51년11월 중부전선에는 벌써 눈이 덮여있었다.

<우세한 적에 두려움 없이 대전>
이 지역의 전투는 1개소대병력이 거의 전원 희생되면서 고지를 사수, 「유엔」참전부대 중 가장 처절한 전투를 치른 것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담릉·유포」중위가 지휘하는 소대는 「T·본」지역의 2백m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적은 이 고지에 공격을 집중하여 전차 및 포병대로 강력한 지원포격을 가한 다음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적의 포화 때문에 모든 통신망은 두절되어「담릉·유포」중위의 소대는 아군과의 연락이 끊긴 가운데 적의 공격을 맞이한 셈이었다.
그러나 「담릉·유포」중위는 이 고지를 포기할 경우 적의 공격은 아군의 주저항선에 집결되고 이렇게 되면 넓은 전선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이지만 고지를 사수하기로 결정, 감연히 적의 공격에 맞선 것이다. 사실 「담릉·유포」중위의 소대로써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너무나 병력이 적었다.

<「담릉」중위의 영웅적 항전도>
적은 대대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여 고지의 3면을 에워싸고 공격해 왔다.
아군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가운데 「담릉」중위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대를 지휘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항했다.
적의 공격이 집중된 전면방어선이 무너지자 「담릉」중위는 단신으로 적을 향해 뛰어들어 몇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는 자신도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담릉」중위의 이 같은 영웅적인 행동은 비록 고지를 적에 잃었다고는 할지라도 태국군의 한국참전에 길이 남아 있는 무용담으로 이야기되어오고 있다.
결국 고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몇 명의 소대원이 살아 돌아오기는 했으나 이들 생잔병도 모두 부상한 채였다. 몇 시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 전소대원 중 18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부상했다.
52년11월1일부터 10일 사이 철원 서북쪽 「폭찹·힐」이라고 불리는 235고지에서도 「T·본」고지의 경우와 비슷한 전투를 치렀다.

<사상 무릅쓰고 적2백여 사살>
이 기간에 중공군은 세 차례의 대공세를 보였는데 태국군은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적3개 대대규모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내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리틀 타이거」의 별명을 얻었다. 적은 이때 조그마한 이 고지의 태국군에 강력한 포격을 퍼부은 다음 3개대 대병력이 개미떼처럼 기어올랐으나 태국군은 중대병력의 절반이나 사상자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이 고지를 사수,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0여 일 동안 세 차례의 대공격을 막아낸 태국군은 2백4명의 적을 사살하고 4명을 포로로 잡아 한국전에서 보기 드문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때 태국군의 희생은 사망7명·부상20여명으로 3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이곳은 철의 삼각지를 지키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국군이 이를 사수하지 못했을 경우 서울이 위태로왔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태국군은 21년 동안 1만8백50명이 다녀갔고 전사 1백14명·부상 7백94명·실종 5명 등 9백13명의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요일지(1952년8월17∼20일)
※17일 ▲문등리 서방서 격전 ▲신성모씨 일본서 귀국 ▲주은래를 단장으로 하는 15명의중공사절 「모스크바」도착
※18일 ▲B-29, 신의주 탄약공장 폭격 ▲태풍, 중부지방에 내습
※19일 ▲휴전회담1주=휴회
※20일 ▲「미그」회로서 5차 공중전, 적기 1대 격추 ▲미구 축함 피격 13명 사상 ▲「스탈린」-주은래와 회담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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