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현제 심사정 작|하마선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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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제의 작가적인 역량이나 그 화풍을 조리 있게 바라보고 아울러 그 평가를 해준 과거의 문헌 중에서 주의할만한 것은 완당 김정희의 현제화첩제발이다.
이에 보면『현제의 그림공부는 심석산법으로부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피마자 또는 미법에 속하는 대혼점법을 쓰기도 했으나 중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대부벽피을 쓰게 되었다.
대체로 현제는 회사에 관해서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으나 그 중에서도 화훼와 초충 그림을 더 잘했었다. 그 다음이 상모 그림, 그 다음이 산수화였었다. 따라서 현제는 산수화의 제작에 힘을 한층 기울였으며 인물화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었다.
수려하고 임리한 맛에 있어서 때로는 겸재에 미치지 못하나 경건아일한 맛은 오히려 겸재를 앞질렀다고 할 수 있었다』라고 비평하고 있다.
세기의 안목인 완당다운 비평이어서 현제의 그림을 잘 아는 사람들은 대개 이 비평에 공감을 느끼게 된다. 완당의 비평대로 현제 예술의 각 분야 중에서 산수화가 다른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자인했던 현제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산수화의 수련에 한층 힘을 기울였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패교심매회」니 「강상야통도」니 하는 관록 있는 산수의 대성을 가져온 것이며 특히 희대의 역작 「촉잔도권」같은 대작을 낳게 해주었다고 믿어진다. 실상 농채를 즐겨 쓴 현제의 화훼초충이나 후모 작품은 비록 소품들에 불과하지만 이조시대 5백년 화단을 훑어보더라도 이에 따를 작가가 없다고 하리만큼 원숙하며 또 그 독보적인 기법을 정립했었다.
화훼 초충을 완당이 그만큼 평가해 준 연유도 바로 그러한 현제법의 격조를 인정한데에서 오는 것이다.
이 「하마 맥선인도」는 비록 편화에 불과한 소품이지만 두꺼비와 더불어 가락을 맞추어 덩실거리는 선인의 모습 속에 탈속한 작가자신의 풍모가 어려있는 듯 싶을 때가 있다.
현제는 청송심씨였으며 죽창 심정주의 아들이었고 1707년에 낳아 1769년에 63세로 돌아간 분이다. 소시한때 겸재 정선에게 사사했다고 하나 그 뚜렷한 영향은 보인다고 할 수 없다. (견본 담채 22.9㎝×15.7㎝) <최순우-국립박물관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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