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진주성 선열들의 호국정신 기려 정화계획 따라 복원 한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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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임난 3대첩의 하나 왜군대파>
낙동강의 한 샛줄기인 남강이 휘돌며 이룩한 조그만 언덕. 진주성은 높이 30여m에 10만평 남짓한 강가의 독립구릉이다. 함양·산청에서부터 내리닫는 지리산의 수량이 진주에서 동으로 꺾이어 의령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하는데 비록 작은 언덕이지만 이곳은 유사 이래의 막중한 요새였다. 지리적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길목이라서 오늘날에도 교통이 사통팔달이다.
일찌기 가야시대엔 이곳을 일컬어 거열성이라 했고, 고려시대엔 왜구를 방어하는 남해안의 중요기지로서 수차에 걸쳐 수축했었다.
그러나 진주성이 보다 유명해진 것은 임신왜란. 임란 중의 3대첩의 하나가 바로 진주성대첩인 것이다. 진주일대의 관이나 민,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 부민이 모두 참전하여 한번은 왜군을 대파했고 또 한번은 6만 군·관·민이 강렬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항쟁했다. 심지어 왜장을 안고 강물에 투신한 논개의 의적도 이때의 일이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읍성으로서 성안에 관아와 옛 장사들에 대한 사당 및 성벽이 온전하였겠지만, 어느새 성벽은 허물어져 자취마저 희미해지고 건물이 퇴락해 버려 남아있는 것이란 촉석루와 창열사·논개사당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성안은 온통 남성동 6백여 호가 촘촘히 들어서 주택지를 이루었다.

<17억 들여 사적공원 꾸밀 계획>
그래서 이 장하고 의로운 성을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또 그들의 호국정신을 이어 받자는 의도에서 정부는 1969년5월 17억원의 방대한 예산을 세워 이곳의 정화사업을 착공했다. 석성과 성문을 원상태로 다시 쌓고, 기존 건물들을 보수하는 그 제1차 공사는 금년으로 마감됐다. 문화재관리국이 보조하는 국비 2억원과 시비 1억5천만 원을 충당하여 총 3억5천만 원이 소요됐다.
진주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촉석문은 촉석루 앞 광장에서 기초를 찾아내 돌로써 홍예를 쌓고 목조의 문루까지 덩그렇게 지어놓았다. 북장대·서장대의 망루와 초소인 보루도 짓고 허물어졌던 3개소의 암문도 옛 모습을 되찾아 놓았다.
성벽은 길이 1천7백m. 물론 이것은 옛날의 내성에 불과하다. 지금 진주시의 중심가를 이루는 곳으로 외성이 뻗쳐 있었고, 그 밖으로 소류지가 있어 성을 옹위했었는데 연못은 메워져 집이 들어서고 외성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현존 성안의 면적은 6만여평. 진주시는 남아있는 이 내성만이라도 잘 가꾸어 사적공원으로 꾸밀 계획에 부풀어 있다. 6백50동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여 나무를 심고 혹은 박물관·문화관·회관·누대 등을 세우며 또 동식물원과 연못·분수 등도 설치하여 미화할 예정인 것이다.

<논개의 애절한 사연 되새기게>
다만 문제는 나머지 14억원의 공사비 주선인데 당초 예정한 75년까지는 완성해 보겠다는 것이 시 당국의 열망이다. 진주 시민들이 이 공사를 결코 「복원」이나 「정화」라 하지 않고 「성지화 계획」이라 굳이 일컫는 심정으로도 그 열망은 이해할 만 하다.
촉석루에 오르면 발길은 자연 강물을 굽어 의암에 미치게 되고 다시 논개 사당에서 거듭 임란의 애절한 사연을 되새기게 된다. 진주시 부녀자들로 구성된 창열사가 논개사당의 제사를 대대로 물려 모시고 있는 것은 다른 어느 지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
서장대 밑으로 김시민·최경회·김천일 3장사의 위패를 모신 창열사에는 낡은 비석과 새로운 석물들이 줄지어 있어서 후세사람들의 기리는 정표가 역연하다. 배불 사상이 농후하던 조선조 시대에 사찰을 성안에 두기란 극히 희귀한 터인데, 진주성-그것도 내성안의 호국사는 전래의 것이다. 임란 중 진주성 싸움에는 승병의 역할이 적잖았던 까닭에 그들의 넋을 위로하여 고전장에 그대로 두어온 것이리라.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4백여년전 전부민의 의로운 항쟁의 기백과 정신이 연면히 이어오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풀이되며, 오늘날 진주 시민들의 이 사적에 대한 성지화 염원이란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설을 환기시켜 길이 거울 삼자는 데 있는 것이다. <글·이종석 기자|사진·이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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