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5)피어린 산과 언덕(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화천 지구 전투>(1)
51년 하반부터 적의 진지 요한화와 휴전회담 진행을 위한 「유엔」군의 정치적 배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고지쟁탈전은 53년 중공군의 7월 대공세로 그 막을 내리고 3년 동안의 한국전쟁도 「휴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중공군은 휴전전 화천발전소를 확보할 심산으로 5월 중순부터 화천지구의 한국군 2군단의 제5·제3사단지역에 계속 집중공세를 가해왔다.
그래서 한국군 제2군단과 중공군은 화천북방의 동서로 뻗친 능선들과 그 전후에 위치한 949·삼각봉·M-1·「텍사스」·973·748 등 대소 5백여개의 고지들을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두달 동안 계속했다.
아군은 중공군의 5월과 7월 공세로 949고지에서 백암산까지 밀렸었으나 최후의 반격전으로 현 군사분계선까지 밀고 올라가 휴전을 맞았다.
휴전직전 전전선의 전투 중 가장 격렬했던 화천지구 전투에서는 피아간에 1개 소대, 1개 중대 병력이 전멸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전투들을 지휘했던 어느 지휘관은 휴전이 되자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이때까지 흘린 피의 댓가에 회의를 느끼고 실의에 빠져버리기도 했다.
다음은 화천지구 전투를 지휘했던 한국군 2군단장과 재5사단 지휘관의 이야기.

<적의 시체 잿가루 돼 날아가고>
▲정일권씨(당시 한국군 제2군단장=중장·예비역육군대장·공화당의장서리·55) <중공군은 53년5월부터 전전선의 포를 집결시켜 화천을 중심한 우리한국군 2군단지역에 발악적인 집중공격을 가해왔어요. 적이 우리지역에 최후공세를 취한 것은 ⓛ화천발전소를 차지해 휴전 후 한국의 전력에 곤란을 주고 ②한국군에 일대 타격을 입혀 그 위신을 실추시키고 미군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하며 ③한국군 단독의 전투능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적은 5월 공세로 한국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은 다음 휴전 전에 그들의 실지를 탈환할 계획이었던 겁니다.
적의 공세가 시작되자 우리는 처음 3일동안은 우천으로 인한 보급난과 지휘통제의 애로 등으로 아주 곤경에 처했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적의 기도하는 바를 파악한 후로는 각예하사단을 분산 독립시켜 사주방어전을 펴게 했어요. 어느 부대는 적이 배후로 들어온 것도 모르고 정면의 적과만 대전하고있는 일도 있었지요.
야간 육박전으로 고지 위에 쌓인 적 시체들은 날이 새면서 퍼붓는 아군포격에 잿가루가 돼 날아가 버렸어요.
당시 우리가 군사적으로 더 북진할 수 있었느냐는 문제는 나는 상당히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때는 적의 진지와 화력이 아군의 우세한 항공지원이나 포지원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구축, 증강돼 있었어요.>
▲한신씨(당시 5사단부사단장=대령·현 합참의장·대장·50) <나는 52년9월 김종갑 사단장과 함께 5사단 참모장으로 부임, 동해안에서 351고지 전투를 마치고 화천지구로 들어가 부사단장이 됐습니다.
금강산입구에 위치한 동부전선 아군의 최전초인 351고지는 장창국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에도 5사단이 북한공산군 9사단과 쟁탈전을 계속했고 아군 제11제3사단도 격전을 벌였던 요새였어요. 11월초의 전투 때는 우리가 월미산까지 공격, 점령할 수도 있었는데 상부의 허가를 못 얻어 좌절되고 말았어요.

<먼저 퇴로 만들어놓고 반격전>
우리는 적의 감제고지인 월미산과 351고지간에 차단포격을 가하고 27연대와 야간전투에 능한 고광도 대령의 36연대를 후사면으로 올려붙인 후 닦아놓은 도로를 이용해 전차포 사격을 퍼부어 일시 뺏겼던 351고지를 탈환했습니다.
당시 우리 5사단은 산악전을 잘하는 최강사단중의 하나로 평판이 나 있었는데 특히 35연대장 고백규 대령은 「산악의 왕자」라는 별명까지 붙은 역전의 지휘관이었어요.
53년5월부터 화천북방의 한국군 2군단 정면에는 우리병력의 5∼6배나 되는 중공군이 일대의 결전을 시도하는 대공격을 시작해 왔습니다.
적은 5월12일 우리5사단 정면의 689·923·884고지들에 포격을 시작하더니 파상공격으로 매일 밤 공세를 취해 옵디다.
689고지(일명 「텍사스」고지)에서는 6일동안 주인이 10여회나 바뀌면서 주야 계속 혈전이 벌어졌었는데 최후적으론 우리가 점령, 확보했읍니다.
우리 5사단 지역내의 최전방 전초진지들을 방어 중이던 2개 연대는 949·삼각봉곤지 일대에서 중공군의 5월 대공세를 당해 50여일간 혈전을 거듭한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그후 계획된 방어진지로 철수했어요.
949고지 일대는 지형적으로 좌측에 북한강이 흐르고 길이 단일통로 밖에 없어 주간행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로 야간전투를 했읍니다.
그러니까 만약 적이 우측으로 배후를 차단해 뚫고 들어오면 우리는 후퇴할 퇴로를 완전 차단당한 채 북한강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불리한 입장이었어요.
나는 비록 불리한 작전이긴 했지만 이 949고지 전투야말로 갖가지 깊은 의미의 교훈을 담아 남기고 싶은 전투였다고 생각해요.
나는 중공군의 5·27 대공세가 시작되던 날밤 적 시체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고 적의 공세가 제한공격이란 것을 알았어요.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위해 무지한 병사들한테 공격개시 전 술을 잔뜩 퍼 먹여 취기로 달려나가게 한 모양입디다.
사실 적이 술 기분이 아닌 올바른 상태로 그러한 대공격을 해왔다면 우리 5사단은 큰 위기에 빠졌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우선 이 같은 중공군의 제한공격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공병1개 중대를 우리 방어진지 우측방향으로 적과 접선될 때까지 나가도록 해서 적의 배후공격을 방어케 했읍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우리가 있는 진지에서 방어전투를 한다는 자체가 힘에 겨운 실정이었습니다.

<54일 계속된 방어전투서 개가>
그러나 나는 사단수석고문관 「파워즈」대령한테 현 전선은 사수하여야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어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더군요.
나는 물론 힘에 겹지만 앞으로의 반격작전을 위해서는 최소한 이 선은 확보해 놓아야겠다고 다시 얘기했더니 고문관은 수긍을 하데요.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반격명령이 내립디다. 내 판단으론 반격작전을 한다는 것은 전체 작전면에서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될 것이 확실했어요. 그러나 일단 반격을 하라니 명령에 움직이는 군대로서는 그대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때 사단사령부는 좁은 부교 하나를 놓고 강 건너에 있었는데 나는 즉각 공병을 동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북한강 곳곳에 도보교를 가설시켜 철수로를 만들어놓고 반격을 시켰읍니다.
우리측 반격이 개시되니까 적은 5분 간격으로 맹렬한 차단사격을 가해댑디다. 아군 증원부대는 적의 사격이 멈추는 틈을 타서 건너 뛰어가 고지능선에 달라붙었어요.
나도 주공대대의 관측소를 뛰어올라가 봤더니 벌써 김중교 대대장이 좌측 팔에 부상을 한 채 계속 지휘를 하고 있더군요. 시초부터 반격작전의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것이고 또 실제 반격전에서 얻어진 결과는 생각한 대로 였읍니다.
중공군은 이날 밤 보병과 포병의 협동 하에 대공격을 가해 왔던 겁니다.
나는 밤 12시쯤 사단본부와 연락을 취하며 천막 속에 앉아 있다가 왠지 예감이 불길하기에 나왔는데 근처 전차 옆으로 오니까 내가 있던 「텐트」에 중공군 다발총탄이 날아들데요. 총성이 나는 곳에 일제사격을 시킨 후 가보니 또 술 냄새가 풍기는 중공군들이 죽어 넘어져 있습디다.
이날 밤의 피아공방전은 서로가 결사적이었고 적은 제한된 공격에 일부 성공을 한 셈이지요.
그러나 당시 적의 병력규모와 화력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우리 장병들과 노무자들도 54일간이나 계속된 방어전투에서 참으로 잘 싸웠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중공군은 7·13대공세로 우리 5사단지역의 화천시내까지 점령할 기도였던 모양입니다.
우리 5사단은 이때 좌일선에 35연대, 우일선에 36연대를 배치하고 진지를 구축 중이었는데 13일 밤 중공군은 우리 35연대와 제3사단 23연대가 사단경계를 잇고있는 지점을 뚫고 대거 남하해 금성천을 도하해 내려왔어요.

<희생의 대가없는 휴전에 회의>
그러나 우리 5사단은 이 같은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고 오히려 전에 잃었던 진지 등을 재탈환, 현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갔었읍니다.
우리 5사단은 「아이슬란드」선까지 피격을 해놓고 7월19일 제6사단과 교체하고 나왔어요.
휴전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허탈감에 빠져 1주일 동안을 소주만 마시고 누워 있었어요. 정말 허무합디다.
그 수많은 우리장병들의 희생도 아랑곳없이 통일은 또다시 그대로 염원으로 남게된 걸 생각하니 가슴이 복받쳐 못 견디겠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때 군복을 벗을 결심까지 했었어요.
생각을 거듭한 끝에 부하들의 희생을 보답하는 길은 더 열심히 복무를 하다가 다시 북진의 날이 오면 훌륭한 지휘관으로 전장에 뛰어나가 싸우자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옷을 벗는 일은 단념했읍니다.>
◇주요일지(1952년7월17일∼7월20일)
※17일 ▲철원서방서 전차전 전개 ▲공비소탕 위해 전북 무주군에 비상계엄
※18일 ▲「유엔」군, 철원서방 불모고지서 공산군격퇴 ▲주인「보루즈」미대사, 미국은 「네루」수상의 한국휴전 조정을 환영한다고 언명
※19일 ▲미함재기, 장진 제1·제3수력발전소 폭격 ▲한강철교개통식
※20일 ▲제13차 휴전회담 비밀 회담 ▲「유엔」군 「제트」기 34대, 신의주 상공서 「미그」15기 2대 격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