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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인류학자 「마거리트·미드」 자서전 (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겉으로는 꽤나 잘난체 해도 우리들은 남녀 문제에서는 지나치게 순진한 편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그네스·피엘」이라는 여학생이 정신 분석학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자주 우리 기숙사에 놀러와서 우리를 교육시킨 결과다. 기숙사에선 외부 학생이 와서 잘 살 수 없다는 규정이 엄격했으나 「아그네스」는 용케 눈을 피해 우리와 밤을 새우곤 했다. 「아그네스」가 처음 우리 방에서 잘 때 나는 맏딸 행세하던 버릇대로 그의 잠자리를 차려 주었다. 그랬더니 「아그네스」는 의미 심장하게 『음, 너와 결혼하는 남성은 틀림없이 「외디푸스·콤플렉스」를 갖고 있을 거야. 자기 어머니대신 너에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우리는 또 동성 연애에 관한 것도 얻어들었다. 그리하여 자연 우리 선배들, 기숙사 친구들끼리의 수상한 이야기며 교수들 이야기도 단정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지난 생활에서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수상쩍었던 것이 없었나 돌아볼 정도였다.
우리 친구들은 또 상당한 과격파들이었다. 특히 감정적인 면에 그러했다. 그러나 우리들 밑바닥에는 지독한 보수주의가 흐르고 있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유행을 모르는 구식 「스타일」에 너무 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
우리 친구들은 거의 절반이 유대계였다. 유대인 가정의 아이들은 대체로 친구 교제에 있어 부모의 엄격한 간섭을 받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유대계 친구들이 더 좋았다. 방학 때 집에 왔을 땐 나와 내 주위의 비유대인적인 늘어진 분위기가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기숙사 시절 우리 친구들은 곧잘 극장 출입을 했었다. 「르버트·에드먼드·존스」가 나오는 『멕베드』를, 그리고 「캐더린·코넬」의 독점 무대인 『이혼장』을 특히 열망했었다.
한편으로 우리는 교수의 어린 딸을 맡아 시간 있는대로 돌려 가며 봐주고 돈을 벌기도 했다. 어린아이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싫증나지 않게 즐기면서 돈을 번 셈이다.
나는 드디어 학교 안에선 유일하게 남녀 혼성으로 진보적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인 「선디·나이트·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1921년 봄 우리들은 「사코」와 「반제티」를 위한 모임에 참가했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들로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억울하게 몰려 살인죄를 선언 받고 있었다. 때때로 우리들은 전국 피복 노동자 연맹을 위해 「데모」를 벌이고 투서를 넣기도 했다.
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찬성이었다. 그러나 내가 노조 비가입 노동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그렇게도 생각이 없느냐? 당신들이 일을 하는 시간은 바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시간인 줄 모르는가』고 욕지거리를 섞어 말을 해대는 이야기를 듣자 깜짝 놀라 『그런 말씨를 쓰지 말라』고 큰소리로 야단을 했다.
문학을 특히 좋아했던 우리들에겐 같은 친구 「레오니·애덤즈」의 시가 뽑혀 출판되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대학생이긴 하지만 「레오니」가 이제 진짜 시인이 됐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갖가지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레오니」이외의 우리 친구들 누구도 문단에 이름을 날려 보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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