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강자적 세계관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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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8천5백만 미국 유권자들은 11월7일 (현지 시간) 그들의 제38대 대통령으로 「리처드·닉슨」 후보를 재선시켰다. 그가 받은 표는 개표 집계가 시작된지 불과 몇 시간 후인 8일 하오 이후 이미 총 5백38 명의 선거인단 가운데 당선 가능선인 2백70표를 훨씬 상회하여 무려 5백21표 선까지 육박함으로써 미국 정치 사상 최대의 눈사태 현상으로 압승한 것이다.
10년 전 고「존·케네디」대통령에게 패배한 직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한 그가 눈물을 머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을 당시의 절망적 상황에 비해 본다면 오늘의 그의 영광은 실로 정치가 「닉슨」의 불굴의 투혼을 다시금 실감케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한 자연인의 정치 생애와 관련지어서만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최근 몇 해 사이에 목격해 오던 미국 대외 정책의 현격한 방향 전환과 국가 목표의 궤도 수정을 둘러싸고 일기 시작했던 격렬한 논쟁과 관련해 볼 때, 이번 「닉슨-맥거번」의 대결은 단순한 정치 집단 사이의 대결이기에 앞서 하나의 철학적 대결이기도 하였으며 미국 문명사 내지는 국제 정치사적인 의의마저 띠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본인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한 미국은 절대로 2등 국가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닉슨」의 강자적 세계관과 『미국이여, 다시금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 오라』 고 호소한 「맥거번」의 『선한 「사마리아인」』적 세계관은 지난 선거 운동 기간을 통해 각계 각층의 미국민들을 향해 중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적 인도주의자 「맥거번」 후보의 도전은 고도 산업 사회의 「챔피언」으로 군림한 백인 중산층과 군산 복합체가 지배하는 미국 지배 「엘리트」의 정신적·물질적 가치 체계 내지 그것에 바탕한 지금까지의 강자적 정치 방향에 대한 급진적인 현상 타파로 간주될 만하다.
「닉슨」 후보가 군부·대기업·중산상류층의 야망을 대변해 핵 우위·전쟁에서의 승리, 힘에 의한 평화·권력 「엘리트」의 지배 등을 옹호한데 반해 「맥거번」 후보는 대학생·「히피」· 여성 해방론자·빈민층·흑인·「푸에르토리코」인·반전 병사들의 기수로서 모든 미군을 「인도차이나」로부터 무조건 철수시키고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는 동시 미국을『사랑 받는 미국』으로 축소시킴과 아울러 과감한 세제 혁신으로 부의 소재를 유동화 시키겠다고 「항변」하다 싶이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맥거번」의 도덕주의적 항변은 「닉슨」의 강자적 정치 기술과 실용주의 앞에 한낱 광야의 고고한 소리로 파묻혔을 뿐이다.
「닉슨」 후보는 지난 1년 동안 「맥거번」이 이상주의적 설교와 웅변을 토로하고 있는 동안, 백악관의 TV화면과 북경과 「모스크바」, 그리고 「키신저」라는 무관의 재상을 통해 「파리」에서 사실상의 실천적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맥거번」의 이의 제기를 하나하나 둔화시켜 버리는데 성공했다.
북경과 「모스크바」에서의 평화는 「닉슨」 자신의 말대로 한다면 『인류가 공동의 적인 빈곤과 비참과 질병에 대해 새로운 제휴 밑에 결속될 수 있는 한 시기를 가능케 한 문호개방』으로서 각광을 받았고, 또 한편 금명간 결실될 것으로 보이는 월남 평화 협상은 극성스럽던 반전 「이슈」를 일거에 중화시키는데 탁월한 효력을 발휘했다. 작년 8·15에는 스스로를 「케인즈」 학파라고 자처하면서 비상 조치에 의한 새로운 경제 시책을 가동시킴으로써 심각한 「인플레」 현상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했다.
게다가 「맥거번」의 우상 파괴적인 급진주의에 대해 백인 중산층은 거의 체질적인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화이트·아메리카」의 전통적 보수 기질이 흑인과 학생 등 「무례한」 소수파의 모반에 강력한 역습을 가해 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노동자들의 일부와 젊은 층마저도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의 일치된 지지를 보이지 않고 명확한 분열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역시 미국은 세계 제1의 강국이어야만 한다』고 한 「닉슨」의 선언,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은 「닉슨」 진영의 정치 부패는 어느 의미에선 당연한 정치 풍속도가 아니냐는 일반의 무관심 속에서 「닉슨」이 미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를 휩쓸고만 것이다.
이제 61%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닉슨」 후보는 다시 한번 백악관의 주인공으로 들어앉아 군사력의 우세와 맹방의 자위력을 바탕으로 해 계속 미·소·중공·일·EC에 의한 5극의 균형 구조를 전진시켜, 표면상의 안정 질서를 매듭지으려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월남전·중동 문제·독일 문제·「유럽」이 안보회의·전략무기 제한 협정 등을 계속 마무리 지으면서 대국간의 평화와 「달러」의 가치 회복을 모색, 실질상의 개입축소와 역학상의 우위 확보 및 국내 경제의 보호에 주안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특기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의 대국 실리주의가 지금까지의 맹방과 소국들을 난처한 지경에 몰아넣는 부작용만은 결코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당위성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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