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제자 이지택>|<제28화>북간도(22)|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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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결사대의 활약>
배일열이 높아갈수록 일본 관헌의 검거 수법이 악랄해졌다. 그 대신 한국인들의 싸움도 격렬해져서 일본 관헌의 앞잡이로 다니는 매국노들에 대해 철퇴를 가했다.
당시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에는 현시달 등 20여 한국인 경찰이 있었고 그 아래 끄나풀들이 수십 명 있었다.
명동학생인 충렬대를 비롯한 독립운동 자들은 1차로 이들 끄나 불로 덜되게 노는 자들에게 앞잡이를 그만둘 것을 경고했다.
이렇게되자 일본 경찰들이 용정 명동 등 한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 쉴 새 없이 나와 정탐하기 시작했는데 변장을 하거나 한국인 앞잡이를 데리고 다녔다. 우리 동포들은 누가 앞잡이인지, 독립군이며 동지인지 알 수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마을 단위로 통행인을 불심 검문하는 사태가 되었었다. 만세를 부른지 두 달 후의 일이다.
명동과 정동학생들은 수상쩍은 자를 검문하고 의심스러우면 감금했다.
그러자 일본 관헌은 중국 측에 작용해서 정동학교에 폐쇄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여전히 자위행동을 계속했다. 이 때에 김상호가 명동으로 와서 충렬대 대원 중에서 따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연길현 국자 가의 소학교 교사이던 김상호는 명동학교에서 15명, 정동에서 5명, 국자가 중국인 학생 3명, 화전 사에서 2명 등 20명으로 친일 한인결사대를 조직했는데 그는 이 행동대가 혼춘국민회- 독립기성회가 생긴 직후인 3월 25일께 간도 국민 회가 생기고 임원은 한족 독립기성회 대표들이 그대로 옮겨 앉고 각 지구별 국민 회가 있었다-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결단의 목적은 친일 밀정·순사의 살해 제거였다.
이들은 때론 맹호 단이란 이름으로 친일 앞잡이들에게 경고 장을 보내기도 했다.
5월 중순께로 생각되는데 김용해 라는 왜경 밀정이 있었다. 이 자는 왜놈 헌병과 같이 술 마시다가 이 행동대에 걸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목숨만은 부지했었다. 그리고도 그만 두진 않았다.
한번은 악질 경부 현시달이 맹호 단의 호출을 받고 나와 경을 크게 쳤다. 권총으로 죽인다는 바람에 사임을 결심하고「스스끼」영사에게 말을 꺼냈으나「스스끼」가『무슨 소리냐, 제국의 충신이 약한 소리 말라』고 선동하자 또 앉아 끝내 역적이 되었다.
현의 부하이던 안종인·조기환은 맹호 단의 요구대로 민족의 양심으로 돌아가 사표를 던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들의 행동은 앞잡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큰 사건은 용정의 친일단체이던 조선인민회장 이희덕의 납치사건이었다.
5월 23일이었다. 이는 일본 총영사관에서「친일 유력 인사」로 모시는 자로 3·13만세 등에 가담치 않고 충실하게 앞잡이 노릇을 계속해서 김상호 등 암살대의 제거 목표가 되어있었다.
이날 이가 용정의「영국언덕」근처에 온 것을 명동학생 20여 명 등 독립운동단체의 간부들이 발견, 명동까지 40리를 끌고 와 명동 동구에 있던 문재린씨 집에 감금했다(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씨=한국신학대학 교수·문동환 박사는 이때 소년이었다).
독립군의 간부들은 이의 생각을 고쳐보려고 한 것이었다.
민족독립의 뜻을 설명, 회유하는 한편 이에게 각 지방에 있는 조선인회장들은 물론 현시달 등 조선인으로서 왜경에 붙어먹는 자들은 모두 사직하도록 종용하라고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몰아세웠다.
일이 이쯤 벌어지자 일본 총영사관은 중국 관헌에 작용했다.
연길도윤은 중국경찰이 책임지고 석방토록 해보겠다고 대답, 우선 일본군의 움직임을 막아놓고는 뒤로는 우리측을 두둔해 주어 내놓으라고 하지 앓았다.
그러자 일본 영사관은『불령배(독립군을 가리키는 말)들이 이를 나자 구로 보낸다는 소문이 있다. 힘으로 빼내겠다』고 중국경찰에 통보했다.
동시에 26일 새벽부터 헌병을 풀어 명동학교를 비롯, 장재촌 일대를 수색(?)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미리 집을 비우고 모두 피신해서 한 사람도 잡히지 않았다. 약이 오른 일본 헌병대는 중국 군이 정보를 흘렸다고 비난했다.
이 수색을 계기로 일본 헌병들은 명동학교를 면밀히 뒤졌다. 세계지리와 한국지리책에서 일본과 한국이 완전히 따로 독립된 것으로 표시된 책이 쏟아져 나왔다.
또 학교에 있는 만국기 가운데 세계 모든 나라의 깃발이 있었으나 일장기만은 없었다.
일본 헌병들은 기가 차서『이 학교를 그대로 두지 못하겠구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10월에 들어 헌병 출동, 포위아래 명동학교를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명동의 독립운동 자들은 이희덕을 1주일만에 풀어주었다. 이는 뒤에 일본 관헌들이『얼마나 욕을 당했느냐』고 물었을 때『점잖은 대접을 받았다』고 말해 최소한의 동족애를 보였다. 이후부터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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