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시기심 많고 잔인” → “몽골과 형제맹약 뒤 안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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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26면

김취려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소재. 14세기 원과의 관계가 호전되자 김취려는 사후 백 년 만에 재평가를 받는다. 조용철 기자

원나라 간섭기에 역사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1325년)에서 김취려(金就礪·1172∼1234)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고려사의 재발견 元 간섭기의 역사서술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국가의 덕이 쇠하지 않았는데 전란이 있으면 반드시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신하가 나타나 국왕의 쓰임을 받아 시대의 어려움을 구하게 된다.…공(公:김취려)은 멀리 있는 몽골 군사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적 거란을 공격했다. 몽골과 (형제) 맹약을 맺어 나라의 근본을 순식간에 안정시켰다. 우리 사직의 신령이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신하를 뒤에서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김공행군기’)

1218년 몽골군과 연합해 몽골과 형제 맹약을 체결한 주역 김취려를 높이 평가한 글이다. 이 책에는 1216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물리친 김취려의 행적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현은 형제맹약을 ‘(전란의 피해를 줄여) 고려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세운 커다란 공적’(『고려사』 권21 충숙왕 10년 1월조)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즉 형제맹약은 두 나라 관계의 시작이자, 당시 백 년간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 속엔 몽골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나아가 몽골전쟁 중 사망해 가리워졌던 김취려 역시 재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형제맹약과 몽골 전쟁을 직접 체험한 한 세기 전의 역사가 이규보(1168∼1241)의 생각은 이제현과 달랐다.

원 간섭기 역사학자 이제현의 표준영정.

“몽골은 시기심과 잔인함이 막심해 비록 화친을 하더라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들과 좋게 지내는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지난 기묘년(1219:고종6) 강동성(江東城:평양 부근)의 형제맹약은 형세가 어쩔 수 없어서 맺은 것입니다.”(『동국이상국집』 권28 동진국에 보낸 편지)

이규보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한 몽골과의 형제맹약을 ‘어쩔 수 없이 맺은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심하도다, 달단(몽골을 지칭)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엉큼함은 금수(禽獸)보다 심하다’(『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 기고문(祈告文)’)라고 표현했다. 백 년 사이에 몽골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고려, 몽골제국 중 유일하게 국가 유지
1259년 쿠빌라이 집권기(1259∼1294), 최씨 정권 붕괴와 왕정 복고로 몽골과의 전쟁은 종식된다. 이로써 고려와 원나라(1260년 이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전개된다. 1273년 두 나라는 삼별초의 반란을 함께 진압한다. 1274년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면서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된다. 두 나라가 함께 두 차례(1274·1281년) 일본을 정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접어든다. 즉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천자-제후국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대신 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새로운 관계의 전개는 역사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쿠빌라이 사후 즉위한 원나라 성종은 두 나라가 처음 관계를 맺은 시기를 고려에 묻는다. 고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금나라 치하의 거란 출신) 금산(金山) 왕자가 태조 황제(칭기즈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국호를 ‘대요(大遼)’라 칭하고 자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고려로 침입했다 쫓겨 강동성에 진을 쳤습니다. 조정(몽골)에서 합진(哈眞)과 찰자(札刺)를 보내 토벌했는데, 눈이 쌓이고 길이 험해 식량이 공급되지 못했습니다. 고왕(高王:고종)이 이를 듣고 조충(趙冲)과 김취려를 보내 군사와 식량을 공급하고, 그들을 함께 섬멸했습니다. 이제 76년이 되었습니다.”(『고려사』 권31 충렬왕 20년(1294) 5월)

고려는 거란족을 섬멸한 1218년(고종5)을 두 나라 관계가 시작된 원년으로 보았다. 원나라 무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 노릇 하는 국가는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 (삼한이) 선대(태조 칭기즈칸)에 귀부한 지 거의 백 년이 되었다. 아비가 땅을 일구었고, 자식이 기꺼이 다시 파종을 했다.”(『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1310) 7월조)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몽골제국의 천하에서 유일하게 고려는 백성과 사직을 유지한 국가라고 했다. 형제맹약은 두 나라가 천자-제후 관계를 맺어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백 년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4세기 초 두 나라 지배층이 공유한 역사 인식이었으며,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실제로 어느 때보다 돈독하게 유지되었다. 그럴 경우 형제맹약의 효력을 무력화시킨 1232년 이후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의미 없는 역사가 된다.

원나라의 제후국을 자청한 충선왕
충선왕(忠宣王:1308∼1313년 재위)은 1309년(충선왕1) 7월 죽은 부왕(父王)의 시호(諡號)를 원나라에 요청한다. 이때 부왕 외에 이미 시호를 받은 증조왕(曾祖王) 고종과 조왕(祖王) 원종의 시호까지 이례적으로 요청한다. 1310년(충선2) 7월 원나라는 부왕에게 충렬왕, 고종에게 충헌왕(忠憲王), 원종에게 충경왕(忠敬王)이라는 시호를 고려에 통보한다. 원나라는 고려를 제후국으로 여겨 이렇게 ‘왕’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덧붙여 원나라에 충성을 하라는 뜻에서 칭호에 ‘충(忠)’자까지 붙였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그만큼 철저하고 강했다는 증거이다.

당시 원나라에 시호를 요청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 한다.

“이전에 고려가 송·거란·금의 연호는 사용했지만 역대 국왕의 시호는 모두 종(宗)으로 스스로 칭했다. 원나라를 섬기면서 (천자-제후의) 명분이 더욱 엄했다. 옛날 한(漢)나라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그 까닭에 국왕(충선왕)은 죽은 전왕(충렬왕)의 존호(尊號)를 요청하고, 고종과 원종의 시호까지 추가로 요청했다. 이에 원나라가 조서를 내려 고려의 요구에 따랐다.”(『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 7월조)

국왕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것은 한나라의 관례를 따른 것이라 했다. 즉 충선왕은 천자국 원나라에 대해 제후국으로서 국왕 시호를 요청한 것이다. 시호 요청은 두 나라를 각각 천자-제후국의 공식적인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제현이 저술한 또 다른 역사서 『충헌왕(忠憲王)세가』(1342년)에는 1309년 당시 세 국왕이 시호를 받아야 할 공적이 실려 있다. 고종은 몽골과의 형제맹약, 원종은 1259년 세자로서 몽골 쿠빌라이에게 직접 찾아가 강화(講和)를 맺은 사실, 충렬왕은 1274년 몽골 출신 공주와의 혼인 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을 수행한 공적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천자-제후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면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인식, 즉 형제맹약 이후 백 년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대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현이 저술한 『충헌왕세가』와 『김공행군기』는 그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를 대변한 상징적인 역사서이다. 두 책은 모두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백 년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한편으로 이제현이 살던 당시 백 년의 역사서이다. 그야말로 ‘고려판 현대사’라 할 수 있는 당대사(當代史) 역사서이다. 김부식이 삼국시대 역사인 『삼국사기』(1145년)를, 1451년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찬한 것처럼 전(前)근대 역사는 지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제현이 현실적인 영향력이 큰 당대사를 편찬한 사실은 주목된다. 당대사 연구가 새로운 역사서술 경향으로 대두한 것이다. 형제맹약을 관계의 시작으로 볼 때 가장 큰 걸림돌은 1232년부터 1258년까지의 30년 전쟁에 관한 서술이다. 당대를 살았던 이규보의 생각에서 드러나듯 몽골에 대한 적대적 서술에 대한 수정이 필요했다. 문제가 된 것은 30년 전쟁 당시 재위한 국왕의 역사 『고종실록』이다. 1277년(충렬왕3) 완성된 이 책은 고종의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시점인 1309년에 다시 편찬된다. 수정의 초점은 당시 전쟁에 대한 평가문제일 것이다.

당대사 연구가 새로운 역사서술로 대두
민지(閔漬)는 충렬왕 재위(1274∼1308) 말년 『세대편년절요』를 편찬하는데, 태조부터 고종·원종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서술의 초점은 고종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 관한 새로운 서술일 것이다. 이제현은 민지의 저술을 토대로 『충헌왕세가』를 저술했으며, 민지의 역사서는 충선왕이 즉위한 1308년 원나라에 보내진다. 이로 볼 때 이들 저서는 몽골에 대한 적대적 서술을 수정한 것이 분명하다.

원나라 역시 전쟁을 전후한 고려의 역사 서술에 관심을 가졌다. 1325년(충숙왕12) 원나라는 칭기즈칸 이래 원나라에 공을 세운 고려 인물에 대한 역사 편찬을 고려에 요구한다. 몽골군과 함께 거란족을 물리치고 형제맹약을 체결한 김취려의 행적을 적은 이제현의 『김공행군기』는 이때 저술된 것이다.

14세기 고려 왕조는 원나라와 수립된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몽골과의 30년 전쟁에 대한 재서술 등 가까운 백 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이른바 ‘고려판 현대사’인 당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 서술이 현재 전해오는 『고려사』 가운데 원 간섭기 역사 기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이 책은 이제현의 역사서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원 간섭기 역사는 고려와 원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고려와 몽골의 전쟁에 관한 서술이 풍부하지 않다. 살아 있는 현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이 과거의 다양한 역사를 오도 또는 말살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한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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