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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칼럼] 보고 싶네, 제시 노먼 뒷담화 하던 ‘개털’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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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27면

미국의 흑인 소프라노 가수 제시 노먼(1945~). 목소리가 풍요롭다. 뮌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옛 기억의 장소로 중부시장 멸치골목이 있다. 코를 쏘는 건어물 냄새가 진동하던 그 시장통 한 귀퉁이 2층에 ‘바흐 스튜디오’라는 이름의 오디오 가게가 있었다. 가게라기보다는 돈 없는 개털들의 동호회 비슷한 공간으로, 거의 부속품에 가까운 진공관 시대 고물들을 주물러 사고팔고 하는 곳이다. 하고많은 그곳의 추억 중에 ‘제씨 노만’이 있다. 발음이 중요한데 ‘제기랄’할 때, 그리고 ‘에이 씨!’라고 욕할 때의 제와 씨가 합쳐져 ‘제에 씨! 노만’으로 소프라노 제시 노먼을 불렀다. 주인장 양차열씨가 워낙 그녀를 싫어해서 그런 건데 찾아드는 인간들도 하나같이 그 ‘제에 씨!’를 다 따라 했다. 가난하고 주관적인(!) 주식 브로커, 만화가, 출판쟁이, 만년 백수 등등이 모여들어 제멋대로 클래식 음악을 탐닉했다. 난로가 시원찮아 코끝이 시리던 그 겨울날의 긴긴 ‘마태수난곡’이 떠오른다.

[詩人의 음악 읽기] 중부시장 멸치골목의 추억

노먼 레브레히트의 책이 재출간됐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겸 소설가인데, 하도 독설을 남발해서 언제나 수십 건의 소송에 걸려 있다는 재미난 현역 인물이다. 10여 권의 저서 가운데 왜 말러인가? 같은 책은 꽤 독특한(혹은 편향적인) 관점으로 아주 좋아하는 책이다. 이번에 재출간된 클래식 음반 세계의 끝은 그야말로 재미 만점으로 나 같은 비전공 음악 애호가가 읽기에는 최적의 독서물이다. 첫 장 음악동네 이야기엔 별별 이야기가 다 있지만 카라얀에 대한 그의 못 말리는 적대감이 도처에 나와 킬킬거리게 된다(정말로 미운가 보다). 둘째 장은 그가 꼽은 불멸의 음반 100선, 끝으로 셋째 장은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음반 20선인데, 바로 이 대목이 흥미롭다. 무슨 자신감으로 최악의 음반을 골라낼 생각을 했을까.

중부시장 멸치골목, 가난한 개털들의 ‘바흐 스튜디오’에서 음대 출신 전문인을 만난 기억이 없다. 하지만 개털들은 언제나 지긋지긋할 정도로 음악의 뒷담화를 펼쳐나갔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신기한 정보, 극도로 주관적인 감상평, 탄식과 경탄 두 가지만 존재하는 반응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와락, 멸치 냄새가 난다. 노먼 레브레히트의 글에서 썩어가는 큼큼한 건어물 구린내가 풍긴다는 말이다.

카라얀의 수퍼 베스트셀러 ‘아다지오’

‘바흐 스튜디오’의 소소한 개털들의 음악 사랑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우리는 노바디였다. 그 초라하고 지저분한 실내에서 열심히 풀어대는 ‘썰’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구라’일 뿐이었다. 그걸 서로들 알았다. 어쩌다 끼어드는 세련된 신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고, 그 스튜디오의 공동 운영자였던 술꾼 아저씨는 하루 종일 소주병만 비우곤 했다(날마다 대여섯 병 이상은 마시는 것 같았다).
레브레히트가 작성한 최악의 음반 20선에 제에 씨, 아니 제시 노먼의 음반이 두 장이나 들어 있었다. 세이지 오자와가 지휘한 비제 ‘카르멘’ 음반 평은 ‘아무리 해도 이 음반은 정도가 심하다’로 시작하고, 로린 마젤 지휘의 말러 교향곡 ‘부활’에 대해 제시 노먼과 에바 마르톤이 함께한 독창부를 이렇게 평한다. ‘이 연주의 참혹함은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이며, 독창자들이 일어나 최악의 음성으로 일격을 가하려 하자 오케스트라 연주자들과 합창단원들이 차라리 회계사나 배관공으로 일했더라면 이런 험한 꼴은 보지 않을 텐데 하는 표정을 짓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아, 이쯤에서 제시 노먼을 위한 변호를 해주어야겠다. 그녀의 내한공연을 알리는 신문기사 한 대목을 옮겨본다. ‘오페라의 검은 여신으로 불리는 제시 노먼은 여자 파바로티라 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성량과 깊이 있는 음색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꼽힌다. 그의 노래는 인생의 깊이까지 담고 있어 일부 전문가로부터 마리아 칼라스를 능가하는 소프라노로 평가되기도….’

후미진 멸치골목의 필사적인 음악 사랑을 세계적인 명사 노먼 레브레히트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양쪽을 다 경험한 내가 증언한다. 같은 냄새가 난다는 말이다! 그가 고른 최악의 음반 20선이 그 증거다. 집에 전축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 라이선스로 나온 카라얀의 ‘알비노니: 아다지오, 파헬벨: 캐논, 코렐리: 크리스마스 협주곡, 비발디: 협주곡’이 한 장씩 다 있을 것이다. 엄청난 수퍼 베스트셀링 음반이다. 재벌 회장님이 왕림한 사무실 분위기 같다는, 설탕을 끼얹은 애플파이 같다는, 잘 조련된 군대로 밀어붙이듯 미끈한 공산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래서 옛 시대 특유의 변칙적인 매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작곡가가 던진 풍자의 정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레브레히트의 평가를 오래전 우리의 멸치골목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흩어진 멸치들은 다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살까? 양차열은 어디 먼 곳에서 복사집을 한다는 소식이 있고, 온종일 술만 마시던 그 퉁퉁한 공동 운영자는 탈 없이 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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