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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제28화>북간도(16)|이지택(제자 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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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오 독립선언서>
간도가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안성마춤인 것은 일본과 중국이 싸우는 관계도 있었지만 특히 유리한 것은 노령에 인접해 있었던 점이다.
독립운동자들은 일본 놈을 쏘아 죽이거나 일본군을 습격한 뒤 헌병들이 쫓아오면 혼춘을 거쳐 노령으로 피신하면 안전했던 것이다.
혼춘에서 노령까지는 1백 리 정도밖에 안되었고 국경에는 초소가 하나 있었으나 경찰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러시아」측의 세관원이 두 사람쯤 나와 있었다.
이 길목을 지키는 세관을 피해서 가는 길도 얼마든지 있었다고 국경 일대는 갈대밭이어서 숨기에도 좋았다. 혼춘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주일 가량 걸렸는데 장령자를 넘어서 처음 있는 「러시아」의 도시가 연추라는 고장이었다.
「우끼에프스코에」라는 지명이 있지만 우리동포들은 연추라고 이름을 지어 물렀다. 「블라디보스톡」은 흔히 해삼위라고도 불리지만 이 거리에는 신한촌이란 한국인 집단거주지까지 있어 망명자들의 안식처였다.
또한 「러시아」인들을 통해 무기를 사들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회서 말한 바 있지만 북간도의 웬만한 동포들은 권총 한 자루쯤 휴대하고 있었다.
연락부절로 노령을 왕래하는 독립군들이 한 자루씩 사 모은 것이었다. 1915년 무렵엔 「러시아」제 장총 한 자루는 20원, 권총은 15원 정도였었다.
독립군들은 여유가 있는 한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고 모은 돈은 해삼위로 보내서 무기를 사들이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대납자에 남세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독립운동자들의 큰 재정적 후원자였었다.
무력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은 많아 예거하기는 어려우나 1915년에서 18년 사이에 북간도에서는 항일기운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간민회와 지사 등이 항일교육을 실시했고, 고국에서 좇긴 지사들이 득실했고, 총기 같은 무기를 마음대로 구할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북간도에서는 서울의 3·1운동보다 1년 앞선 1918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른바 무오 독립선언이다. 이것은 북간도의 한국인 지도자들이 볼 때 기운이 성숙했다고 생각한 때문인데 명동에서는 김약연 강봉우 정재면 강백규 김영화 등이 참가했었다.
이 독립선언의 동기는 「러시아」혁명에 관련, 일본군이 출병한데 자극되었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명했지만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할 수 없어 결국 일본군은 북간도로 회군해 왔던 것이다. 그 때의 구실로는 부령배를 토벌한다는 것인데 즉 한국인 독립지사를 뿌리뽑겠다고 한 것이다.
중국은 이 일본군의 간섭에 항의했고, 우리동포들은 만행에 항의했으나 세계는 오히려 일본을 두둔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전세계의 한국동포들은 우리가 독립민족임을 세계에 밝혀야 한다고 해서 이 무오 독립선언을 낸 것이었다.
명동에서 처음 모임을 가진 것은 영신중학교 옆 교회앞 집이던 강봉우의 집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18년 4월이다. 지금 이 무오 독립선언서의 원본은 없어졌고 일본 정보당국에서 일본말로 번역 보관한 것만이 남아있다.
이 선언서는 뜻깊은 것인데도 별로 소개된 바 없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대한동족 남매와 아편구의 우방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평등복리를 세세아자손려민에게 전하기 위해 여기 이족 전제의 학압을 벗어나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한다. 우리 대한은 태고로부터 우리 대한의 대한으로서 이족의 한이 아니로다. 5천 사의 내치외교는 한왕한제의 고유권으로서 백만방리의 고산려수는 한남한녀의 고유재산이다.
기골문언이 구아보다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고 만방과 화협하여 세계에 전진할 천민이로다.
한의 일부의 권, 척지라 하더라도 이족들이 점거할 권한이 없으며 한 사람의 한민이라도 이족들이 간섭할 조건이 없음으로써 하여 우리 한나라는 완전한 한인의 한일지어다.
오호! 임진왜란이래, 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적악은 만세에 덮을 수 없을 것이다. 갑오이 래의 죄적은 만방에 의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호전의 악습은 자보자위를 핑계삼아 마침내는 반천역인의 보호합병을 강제하고 그의 윤맹의 패습은 이름을 영토보존 문호개방이니 기회균등이니 하여 구실을 삼다가 마침내 몰의무법한 조약을 강제로 맺고 그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를 핍박하여 신화의 전달을 조회하고 학문을 제한하여 문화의 유통을 방우하여 인권박탈·경제농락을 일삼았도다.
군경의 무단과 이민의 암계로서 멸한식일의 간흉을 실행하고 적극·소극의 수단으로써 한족을 멸마시키려함의 기하인고.
간흉이 이 같이 극을 다함에 하늘이 일본의 예덕을 미워하여 우리에게 호기를 주었도다. 하늘의 뜻에 따라 인도에 입각한 대한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들의 합방의 죄악을 선포 징계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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