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의 재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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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임진왜란직전 일본에 파견됐다 돌아와 일본이 곧 침입하리라는 상사의 복를 무조건 부정했다고 해서 국방태세를 이완시켜 적을 이롭게 한 장본인처럼 비난을 받아온 김성일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이 벗겨져야한다는 주장이 최근 학계에서 대두되고 있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은 최근 김성일 현존 학문들을 모두 모아 『학봉전집』을 영인 발간, 그의 애민, 애국의 전식을 밝히는 증거로 제시했다. 여기에는 발간되어온 「학봉선생문집」ㆍ「학봉손생논 집」「학봉선생문집 부연」은 물론 지금까지 유물로 전해오던 그의 「일고」와「일고 부록」등을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박동묘총장(성균관태)은 『세상 사람들중에는 선생에 대한 지식이 극히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나머지 일본사항귀국 보고에서 선생의 견해가 맞기않았다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해석, 선생의 모든 것을 단정하면서 당시 대일본교섭중에 그의 확고한 주체성과 임란중의 위대한 개국활동은 전혀 모르거나 외면하려한다.』고 지적하면서 김성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면 학봉김성일은 어떤 인물인가?그가 한승문화의 중요한 계승자의 한사람이었고 농민들의 곤급을 해결하기 위해 선진적 의견을 계속 진술했던 선비이고 또 일생을 통해 애민ㆍ애국의 활동과 추제적 외교를 강요했던 이였다.
그의 이런 면모들은 그의 문집에 나오는 글들에서 능히 읽을 수 있따. 특히 그의 인물을 오해케한 일본과의 외교접촉관계에서 실상 그의 진면복은 잘 나타난다고 이우성교수(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는 설명하고 있다.
그가 53세인때인 1590년 일본통신부사로 갔다오면서쓴 「해노록」이나 임신난을 전후해서 그가 정부에 건의한 상주문과장병·민중에 보낸 통보·격훈문들인 할·소·상·공이ㆍ초유문은 특히 중요하다.
상사 황윤길, 회상 허성파 함께 일본사항에 갔을 때 풍신수길의 일본이 교사·오만·무례에 대응한 우리 사절단의 처신에서 특히 김성일의 위치는 두드러지고 있다. 그의 행적 몇가지를 들면 이렇다.
①우리 사절단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떼 일본은 본토에서 「선위」를 위해 마중나온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일본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는 반드시 선위사가 부산까지 가서 맞았던데 비하언 콘 무례였다. 황윤길은 이들의 영접을 기다리지 않고 일본본토로 떠나려 하는 것을 국가위신을 위해 이를 강력반대했다.
②대마도체류중 국분사에 초대된 일행이 당상에 있을 때 부관 간의지가 가마를 탄 채 당상에 올랐다.
이 무례에 대해 황상사에게 퇴장을 주장. 듣지않자 혼자 일어섰는네 이 때 역관 진출운이 『부사가 몸이 붙편해 먼저 일어 섰다』고 해명하자 거짓으로 왜인의 비위를 맞춘 점을 들어 진역판을 매질했다.
왜는 교활하게 가마를 메고온 하인에게 책임을 지어 참지하고 사죄했다. 즉 그는 국체외 존엄을 특히 앞세왔던 것이다.
⑧사절이 몇달동안 국회를 전하지 못한 체 왜도에 머무를 때 평의지가 자기 연회에 우리 학공과 학기를 빌리고자 청했다. 그러나 그는 『외국에 온 사신이 왕명을 전하지 못한 채 우리음악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미당한 처자가 남앞애 노래를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거절했다.
④황상사가 수길의 측근에 뇌물을 주어 국회를 전하려 할 때 그는 국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⑤수길을 만날째 일부는 정하배를 주장했으나 왕이 아닌 자에게는 격외배가 옳다고 주장,관찰시켰다.
⑥일인이 주는 예단에「조선국사신내조」라고 쓴 것을 「말조」가 부당하다고 지적, 시정시켰으나 황상사는 회장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였다.
⑦「대명일통지」소재 아국연혁·풍속의 그릇됨을 비판, 우리민족역사의 정통성과 문화예속의 우수성을 일인들에게 강조했다.
⑧수길의 국서에 우리왕을 「각하」, 예물을 「방물」로 쓰고 「귀국선구인조」등 문귀의 부당성을 지적, 각하·방물은 수정케 했으나 그 밖엔 그들이 듣지않았다.
⑨황상사는 수길국서를 그대로 받아 김성일의 반대를 외면, 굴욕적으로 들여왔다.
결국 이런 황상사도 김부사와 대립이 귀국후의 보고에서 표면화 했다. 황이 곧 일본의 침입론을 되풀이 하자 학봉은 이에 동조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인심이 극도로 해이했던 당시 황상사의 허겁지접한 보고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수습하기 어려운 사태를 초래할 것이며 ②일본이 즉시 쳐들어온다는 확증이 없으며 ③조야를 공동시킴으로써 사항대표로서 저지른 과오를 은페하려는 황의 행위에 부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일본이 꼭 침입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유성룡이나 이환복에게 말하고 있다.
임진난의 무방비상태와 그 피해를 모두 그에게 책임지우는 견해는 위정자가 스스로의 잘못을 감추려한 계략에 불과 했다. 그래서 학봉과는 당파를 달리했던 서인 택당 이직같은 양식있는 인사도 그를 극구 변명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외적애 대비하기위해 먼저 내정을 과감하게 개혁함으로써 민중생활을 안정시킬것을 애타게 주장했으며, 성지의 축조등 무거운 부역이나 국민동원이 조금도 도움이 안된다는 소신을 밝히고있다.
임진난중에도 그는 민중에 호소, 의병을 동원했으며 시기·부안을 품고 의병을 모함하던 관료들을 성도했었다.
결국「학봉전집」은 그의 애국·애족의 뜻과 그의 숭고한 구국참동, 그의 학문을 참답게 인식시키기 위해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공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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