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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피어린 산과 언덕 (3)|두솔산 전투 (2)|고지 쟁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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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51년 6월 당시 전황으론 아군이 「펀치볼」을 둘러싼 능선 좌측의 두솔산을 점령해야만 전방의 「김일성 고지」·「모택동 고지」·「가칠봉 고지」등을 뺏을 수 있고 또한 「피의 능선」의 아군 공격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이래서 두솔산은 피아간에 방어와 공격의 결전장이 되어 서로 확보하려고 혈전이 거듭되었다.
이 요새 지역을 수중에 넣기 위해 미 해병 제1사단의 제5연대는 5백여명의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맹렬한 공격을 가했으나 끝내 점령치 못하자 51년6월초부터 우리 해병대가 투입돼 16일 동안의 백병전 끝에 완전 점령했다.
사실 이 전투는 해병대로서는 본연의 작전이 아니었다.

<미군 기 오폭으로 큰일날 뻔>
상륙 작전을 주로 하는 해병대가 내륙 깊숙이 들어가 험준한 산악에서 적과 육박전을 전개한 것은 그 예가 드문 일이었다.
야음을 타고 암석과 숲을 기어오르며 백병전을 전개했던 해병대의 두솔산 작전은 어느 의미에서는 분대장 급 이하의 「하사관 전투」였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당시의 참전 대대장·중대장·소대장들로부터 계속해 들어 보겠다.
▲윤영준씨 (당시 해병 제1연대 제2대대장=소령·예비역 해병 준장·현 한국 조폐 공사 부사장·51) <우리 2대대는 적의 주 저항 진지인 제9목표를 공격토록 명령을 받고 미 해병 5연대 제2대대와 교체해 들어갔습니다.
제9목표 고지는 우리가 이것만 점령하게 되면 주위의 제5·7·8 고지 등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새지였어요.
첫날은 서문 공격을 했는데 적이 교통 호에 엎드린 채 수류탄을 까 던져 우리 사병들이 많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육탄전 끝에 점령은 했으나 밤에 적의 역습을 받아 후퇴하고 말았어요.
다음날 1분간에 40t씩 쏟아지는 미 해병 사단의 전화력 지원을 2분 동안 받으며 야간 공격을 벌여 3일만에 제9목표를 다시 완전 점령했습니다. 고지를 점령하고 보니 한아름씩 되는 나무들이 포격에 모두 쓰러져버렸고 산산조각이 난 시체들의 팔과 다리가 사방에 나뒹구는데 적병의 것인지 아군의 것인지 구분할 수 가 없더군요.
하옇든 우리 2대대는 이 제9목표를 점령하는데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손실됐고 나중에는 총도 제대로 못 쏘는 신병까지 보충을 받아 전투를 했습니다.
제9목표를 점령한 후 밥과 민가에서 얻어 온 막걸리를 놓고 전 대원이 모여 전사한 전우들의 위령제를 지낸다고 엎드려 절들을 하다가 그만 모두 통곡을 하고 말았어요. 공격 개시 전 미군 항공 지원 때 「네이팜」탄이 우리 대대 본부 천막위로 오폭 돼 큰일날 뻔하기도 했어요. 내가 재빨리 차 내버려 희생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대대엔 서울서 갑부로 살다가 소집돼 온 노동자가 한사람 있었는데 처음에 고지 탄약 운반 작업은 돈을 줘서 동료 노무자들에게 대신 시킵디다. 그는 동료들이 내려올 때 운반해온 우리 부상병들을 몇번 보고 나더니 나한테와 무릎을 꿇고 우리 젊은이들이 이렇게 싸우는데 정말 잘못했다고 빌며 분투를 다짐하더군요.
그후 그 사람은 복무 기간이 끝났는데도 안 돌아가고 남아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강복구씨 (당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9중대장=중위·예비역 해병 대령·현 흥한 화섬 비상 계획 부장·48) <우리 3대대는 두솔산 24개 목표 고지 공격 중 제3목표서부터 투입됐습니다.
9중대에는 선임 장교로 계병도 소위 (현 포항제철 사장실 부장) 소대장 석태진·김문선(전사)·김학렬·오정근 소위 등 7명의 장교가 있었는데 두솔산 전투 중 거의가 부상, 전사했어요.
사병들의 희생과 고투는 일일이 열거키 어려울 정도였구요.
고지가 모두 능선에 연해 있기 때문에 공격은 늘 중대 단위의 종대로 나가야만 됐어요. 종대 공격을 하다 보니 인해 전술이 되고 만 겁니다. 내가 지휘한 9중대는 제6목표부터 주공 부대로 나서 6월7일 제13목표전의 무명 고지로 이동해 올라갔습니다.
이날 고지 중턱에 있는 샘물로 밥을 지어먹으러 내려갔던 사병과 노무자들이 적 포탄 세례를 받아 많이 희생됐어요.
3소대장 김학렬 소위와 박격포 반장 장호근 소위도 진지에서 적 포탄 파편에 중상을 입었구요.
11중대가 재공격에 실패하자 이튿날은 대대 공격을 전개했는데 우리 9중대는 측면을 맡았어요.
김윤근 대대장은 돌격 중엔 중대는 대대로, 소대는 중대로 각각 많게 꾸며 연대 규모의 위장 공격을 하도록 명령합디다.
공격 개시 30분전부터는 비행기·야포·박격포의 순서로 불 뿜는 지원 포격이 시작되더군요.

<적, 대대 규모의 대 반격전>
아침 10시 정각 공격 신호가 떨어져 대원들에게 돌파 명령을 내렸더니 지원 야포를 맞고 날아오는 돌 파편들 때문에 선뜻 나가질 않아요.
나는 하는 수 없이 『야 적이 후퇴한다』고 거짓말로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을 독려했더니 그제야 모두 나가기 시작합디다.
40분만에 가까스로 8부 능선에 올라붙었어요. 계속 기어올라가는데 고지 80m 지점에 이르니까 적의 수류탄이 날아오기 시작하데요.
2소대는 김문선 소위가 공격 중 적 다발총을 맞아 전사하는 바람에 선임 하사가 지휘했습니다.
8부 능선에서 1소대 BAR 사수가 나한테 달려오더니 적 장교가 호 속에서 나와 독전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BAR 사수는 의탁 사격으로 적 장교를 멋있게 명중시켰어요. 고지를 점령하고 확인해 보니 그 장교는 적 중대장이더군요.
고지 50m밑에서 돌격 명령을 내렸는데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어오른 우리 대원들은 고 지위서 적병들과 맞붙어 육탄전이 벌어졌어요.
고지에 올라가 보니 아직도 주위 호 속에서 공산군들이 발악을 하고 있습디다.
40여명은 순순이 손을 들고 나와 생포했고 안 나오고 버티는 것들은 수류탄을 까 넣어 없애 버렸습니다.
우리는 즉각 각 소대별로 인원 파악을 마치고 방어 태세에 들어갔어요.
방어전은 우리 9중대가 정면을 맡고 11중대가 우측을 맡았습니다.
이날 밤 적은 고지를 탈환코자 대대 규모의 대반격을 해왔는데 중화기 소대장 오정근 소위의 분전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요. 오 소위는 사수들이 전사하자 자신이 방아쇠 받침쇠가 떨어져 나간 기관총을 잡고 끝까지 쏴대 방어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목표에서는 아침밥을 먹다 우리 총탄을 맞고 쓰러진 적병의 식기에서 김이 아직도 무럭무럭 나기도 했어요. 제20목표 공격 때는 적이 모두 바위틈에 박혀 버티는 통에 아주 혼났습니다.

<돌격 기회 노려 사흘간 매복>
「네이팜」탄을 퍼부으니까 뜨거워서 못 견디게된 적병 1개 중대가 일시에 바위 위로 뛰어 나옵디다. 화력을 집중해 일제 사격을 가했더니 적은 혼비백산해 후퇴해 버리더군요.>
▲임경섭씨 (당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11중대 1소대장=소위·현 해병대 ○○부대장·대령·41) <우리 11중대는 제6목표에서 9중대와 함께 주공 부대로 나서 야간 공격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어요.
야음을 이용해 밤새 포복으로 고지 8부 능선까지 기어올라가 매복했다가 먼동이 트면 미군 항공기와 야포 지원을 받으며 일제 공격을 가했거든요.
적의 방어가 사수전이었기 때문에 공격이 아주 힘들었어요.
우리 소대의 경우 심할 때는 한번 공격하고 나면 41명의 대원이 15명 정도밖에 안 남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분대장 급의 고참 하사관들은 연대들을 이끌고 밤에 7∼8시간씩 계곡을 따라 낮에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곳에 숨어 있다가 돌격을 했습니다.
제13목표 공격 때는 우리 대원 5명이 적진지 밑의 절벽 밑에 달라붙어서 3일 동안이나 밥을 굶으며 돌격 기회를 엿봤어요.
이 5명의 대원들이 수류탄 전을 거듭한 끝에 적 기관총을 파괴해 버리자 본대가 공격을 해 나갈 수 있었지요. 낙하산으로 투하해 주는 식량과 보급품이 때로는 적의 지뢰 밭 속으로 떨어져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두솔산 일대의 24개 고지들을 점령하는데는 우리 피해도 많았지요. 전사 부고가 속출해 우리 해병대의 전후방 요원이 교체돼 투입될 정도였으니까요.>
▲노원근씨 (당시 해병1연대 3대대 작전 보좌관=소위·현 해병 연○○부대 참모장·대령·44) <우리 3대대는 제3고지부터 우회해 제5·6·11·12·13·14·17고지를 거쳐 20·21고지와 두솔산 정상인 제22고지를 공격토록 명령받았습니다.< p>

<부상병 후송·보급에 애 먹어>
두솔산 전투는 주로 야간 작전이었는데 이것은 「유엔」군은 야간 작전이 없다고 믿는 적의 허를 찌른 결과가 됐고 아주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처음엔 우리 사병들이 낮에 지형 정찰을 해놓은 목표 지점을 밤에 올라가고 보면 엉뚱한 곳으로 잘 못 가는 수도 있었어요.
또 돌산의 암벽을 기어오르다가 낙상하는 부상병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구요.
전투 중 부상병들의 후송 문제는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들것에 싣고 탄우 속의 좁은 산길을 내려오자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보급이 좋지 않아 사병들은 다람쥐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고 김윤근 대대장과 나는 뽕나무의 오디를 따먹으며 허기를 면하기도 했지요.
제20목표를 공격할 때는 적이 대대 OP에서 불과 20여m 밖에 안 떨어져 있었는데 OP에서 도주하는 적을 향해 갈겨댔더니 앞에 나가 있는 공격 중대장은 『제발 뒤에서 총을 쏘지 말라』고 아우성을 칩디다.>
◆주요일지 (1952년5월15∼18일)
※15일 ▲「미그」기 3대 격추 ▲미 공군, 하루에 1천2백회 출격 ▲미상·하원 군사위, 거제도 폭동을 중시
※16일 ▲1만7천명의 반공 포로, 강송 반대를 국회에 진정 ▲중공기 50대, 대만 해협에 침입 ▲「바르샤바」동맹군 발족
※18일 ▲거제도 포로 폭동 진압 ▲포로 수용소 정비 강화 위해 제187공정 연대 증파
※18일▲적, 하루에 포탄 4천 발 발사 ▲일 정부, 「메이·데이」 폭동 용의자 3백87명 검거 ▲대만에 공습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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