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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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학년 된 큰아이가 학교에서 습자 시간이 있다고 준비물을 챙겨달란다.
신문지를 4절 내어 두툼하게 매어주고 멱·벼루·습자지를 내어주었다.
며칠 전부터 붓대를 놀리지만 자세부터 바로잡도록 애를 쓰며 먹을 갈아주었다.
어릴 적에 이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지곤 했지만 세 아이를 키우며 아빠의 전근을 따라다니며 있는 동안 너무도 붓을 가까이 해본 적이 없다. 철 따라 꽃을 많이 만들어 집안에 장식하고 동네 아주머니에게도 가르쳐보고 큰 아이가 3살 때 이웃 분이 편물을 배우기에 학원에 나가 배운 보람으로 겨울에는 옷도 무척 짰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도움도 큰 것이었다.
습자지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직 한자 한자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 주위는 조용한 호수를 연상시킨다.
어느새 옛 선비와 신사임당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시조 한 수를 써 내렸다.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뒤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느라.
늦게 돌아온 아빠가 보더니『아주 잘 썼는데. 으음 좋아』하고 칭찬이다. 아이들에게도 이 뜻을 일러주었더니 집에 일하는 숙 이가 얼른「노트」에 옮겨 쓴다. 이런 시간을 좀 더 갖고싶을 뿐이다. 이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라 빠듯한 생활비로 가계를 꾸미고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을 되돌아볼 여가 없는 주부들은 누구 나가 가질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엄순옥<주부·경북 대구시 남구 봉덕동2구 1106의12 대구주택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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