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 논밭 분간 못할 폐허로|영남수해지구 참상의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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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부산 구덕수원지 사고현장과 경북 월성군 양북면 승천리와 양남면 신대리 일대 등 영남수해현장은 수마가 할퀴고 간 지 5일이 지난 18일에도 참상이 그대로 곳곳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중 월성군의 경우 집터와 논밭, 개울을 분간키 어려운 폐허의 들판에는 솥 등 가재도구와 벼 포기, 쓸려 내린 지붕조각 등이 뒹굴고있으며 수재민들은 폐허에서 수저하나라도 찾으려고 헤매고 있었다.

<부산>바위에 파묻혀 복구 늦어져|천막 속에 가마니 깔고 어린이들 책 없어 학교도 못 가
【부산=이무의 기자】부산수해피해는 계속 늘어 사망98명, 실종 7명, 부상 54명으로 모두 1백59명의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
이같이 부산에서의 인명피해가 늘어난 것은 복구작업이 계속됨에 따라 구덕수원지 둑 아래 서대신동에서만 사망 79명, 실종 7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부산시는 16일까지 이곳에서 대체적인 시체발굴작업을 끝냈다가 17일 다시 철저한 시체발굴작업을 벌인 결과 이날 15구의 시체가 더 발굴되었다.
부산시는 17일부터 집터와 개울을 분간할 수 없는 현장에서 개울을 찾는 작업을 벌이고있고, 수재민들은 폐허로 바뀐 옛 집터에서, 또는 폭삭 내려앉은 집 더미 속에서 수저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집 근처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그러나 물에 떠내려 간 집들은 말할 것 없으나 주저앉은 집들도 집 더미 만한 바위들에 짓이겨져있는 것이 많아 복구작업은 늦어지고 있다.
수재민들은 부산시의 조치에 따라 동래구 반여동으로 옮겨 천막생활을 하고있는데 이들은 『지난번 중부지방 수해 때는 각계의 온정도 대단했지만 이번 수해에는 별다른 구호활동도 보이지 않는다』며 가슴을 태우고 있다.
16일 이곳에 이사온 이재민들은 천막 속에서 가마니를 깔고 맨 땅바닥에서 잠을 자고 건빵과 과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집이 대부분이며 변덕 심한 날씨로 감기에 걸린 사람도 많고 이동식 변소 차가 있으나 공동변소가 모자라 악취마저 풍긴다고 말하고있다.
서구 서대신동 3가65에 살다가 남편과 아들을 잃고 이사온 조중림 여인(35)은『10월 초순에 집이 완공된다는데 그때까지 천막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같다』 면서 『남편과 같이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통곡했다.
구덕수원지 이재민 가운데 구덕·대신·서대국민학교에 다니던 2백15명의 어린이들이 부모들을 따라 반여동으로 옮겨왔으나 전학절차는 물론 교과서 등이 전혀 없어 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고있다.
구덕 수해 지구의 각 국민학교는 18일 임시휴교 끝에 문을 열었으나 이날 첫 수업에 2백여명이 결석했다. 학교측에선 대부분이 학교에서 20㎞떨어진 반여동으로 옮겨갔거나 경황을 잃은 부모들이 미처 전학절차를 해주지 않고 교과서와 노트·가방 등이 없어 학교에 안 나온 것으로 보고있다.

<월성군>3개 읍 면 아직도 고립|주인 없는 시체 6구|닭 건지려다 일가 7명 떼죽음도
【경주=최은휴 기자】지난15일 물이 빠진 뒤에도 월성군 양남면 신대리에는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시체 6구가 다시 내리쬐는 뙤약볕에 뉘어있었다.
수해상황을 살피러 갔다가 이 시체를 본 양남면 서기 도전태씨(34)는 입고있는「러닝·샤쓰」를 찢어 시체마다 눈·코·입을 막아주었다.
이들의 시체는 뒤늦게 신대리 주민들로 밝혀져 수해가 난지 3일 만인 16일 하오에 이 지방출신 심봉섭 의원과 취재간 기자들 몇몇이 조객으로 참석, 합동장례식을 치르고도 시체 처리를 못하고 있었다.
양남면 신대리 30가구 중 홍귀선씨(21)와 권치수씨 등 2가구의 집터는 완전히 돌무지로 변해버렸다.
대종천에서 흘러내린 탁류에 떠밀린 수 없는 바윗돌이 홍·권씨 집을 부수고 말았다.
홍·권씨의 6식구도 이틈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번 수해에서 가장 많이 인명피해를 낸 집은 양남면 기구리 주종학씨(45)와 양북면 입천리 정영자씨(49).
주씨는 8식구 중 6식구가 떼죽음을 당했는데 수해가 나던 13일 아침 살아남은 사람은 경주에 볼일 보러나갔던 주씨와 남아있던 7식구 중 5㎞나 떠내려가다 기적적으로 구출된 둘째딸 선옥양(13)뿐이다.
또 양북면 입천리 정영자씨 일가족 7명의 떼죽음은 너무나도 어이없이 일어났다.
살아남은 이웃 권수복씨(38)의 말에 따르면 정씨 일가는 집에서 기르던 닭 5백 마리를 살리려다 토함산기슭에서 내리 덮친 탁류에 희생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씨는 처음 밀어닥친 물이 계사를 덮쳐 닭이 떠내려가기 시작하자 이를 건져 좀 안전하다고 여겨진 정씨의 안방으로 옮겨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식간에 집마저 덮친 물에 정씨 일가 7명은 닭5백 마리와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월성군의 수해지구 감포·양북·양남 3개 읍·면은 18일 현재 육로가 끊겨 있어 해상보급이외에는 고립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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