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 대표단을 보내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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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적 대표단이 떠났다. 남북 해후의 「축제적」인 흥분이 가라앉고 다시 휴전선의 이쪽저쪽에 차분한 일상 생활이 회복될 것이다.
「손님」을 맞은 밀물 같은 흥분이 썰물 진 갯벌에 서서 이제 비로소 또릿또릿하게 모습을 들춰내는 서울 회담의 의미를 새삼 음미해 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떠들썩했던 매스컴들의 보도에 견주어 본다면 실상 서울 회담이 남겨 준 실체적 소득이란 균형을 잃었다할 이만큼 작은 것이었다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 실망이 곧 소득이었다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4반세기를 적대했던 남과 북이 서로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튼다는 초 일상적인 사태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의 질서를 넘어선 축제적 흥분의 이열치열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또다시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 모르는 긴 남북 대화를 이제 착실하게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실망이 주는 냉각 또한 절대로 필요하다고 우리는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냉각은 빨리 오면 빨리 올 수록 좋다고 보는 것이다.
적십자 회담은 「행사」로서의 허례적 초장을 넘기고 이제야 실질 교섭의 중장에 접어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남북 대화가 앞으로는 「일상화」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찾아온 손님과 맞는 주인의 관계는 일단 끝났다. 서로 입장을 달리한 피아의 관계에서 서울 회담의 경과를 냉철하게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여기에 몇가지 우리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번 제2차 본 회담의 생방송을 통해 온 국민의 격분을 사게 했던 북적측의 몇 가지 강변은 그냥 논평 없이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소위 「민족 주체」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해석이요, 그와 관련한 외세 개념의 부당하고 일방적인 견강부회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민족주체란 한반도의 운명을 한민족 스스로가 결정하는 책임 주체로서의 민족 주체이다.
그리고 또 우리들이 이해하는 민족의 개념이란 민족사 수천년의 경과 속에서 갈아입고 바꿔 입는 계절의 의상처럼 몇 번이고 달라질 수 있는 제도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그 바닥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역사 주체로서의 민족이다. 제도나 이념은 오고가되 민족은 영원하다는 우리들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소신의 표백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민족 주체를 「김일성 유일 사상」이라는 폐소적인 「이데올로기」로 응집시킨 한반도 일단의 한 권력 집단의 독점적인 「자곤」으로 참칭 하려는 억지가 곧 민족과 민족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반도의 문제를 「외세」를 충동해서 다시 국제적 냉전의 논쟁거리로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민족의 아픔을 갈라진 민족 스스로의 자기 결정으로써 해결 짓자는 것이 곧 우리들의 민족 주체성의 발로이다.
불리할 때엔 「유엔」의 깃발에 총을 겨누고, 유리하다 싶을 때엔 바로 그 「유엔」의 논쟁터에 민족의 운명을 도마질시키려는 것을 우리는 민족 주체성의 발로라고 보지 않는다.
소련군 차를 빌어서 동족 전쟁을 도발하고 힘이 부족할 때엔 중공원병을 빌어서 조국의 강산을 피로 물들이는 것은 「외세」 의존이 아니고, 침략 전쟁을 제재하려는 「유엔」군과 한국 통일과 부흥을 위해서 파견 된 「유엔」기관은 「외세」라는 억지 소리도 이성 있는 사람의 납득을 얻지는 못한다.
지나간 동서 냉전의 숙명적 소산이었던 남북한의 대립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상호 방위 조약으로 얽힌 이 긴장 상태를 사실로써 인정하고 바로 그러한 긴장 상태를 풀기 위한 첫 시도로서 남북 대화는 시작되었다. 이 마당에서 「주체」와 「외세」에 대한 일방적인 억지 해석으로 논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민족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20년 전의 과거로 역전시키는 결과 밖에 가져 올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떠나는 북적 측 대표단을 보내면서 그들이 부질없는 빈 맘의 입씨름을 거두고 겨레의 현실적인 아픔을 덜어주는 적십자 사업에 진정 「외세」에 기댐이 없이 민족 주체성을 살리는 자세로 임해 주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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