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 <제자 이혜봉>|<제27화> 경·평 축구전 (4)|최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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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평 축구단 창단>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경·평전이 29년, 30년의 2회에 걸쳐 서울에서만 열렸다가 그 후 왜 3년 동안 중단되었는지에는 여러가지 얘기가 나돈다.
경성이나 평양이나 똑같이 「스폰서」 (전주)가 확실치 않고 통솔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축구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유행이 퍼져갔고 하다 못해 소학교 팀도 있었고 전북의 순창 같은 벽촌에서까지 경성 대회에 나올 정도였으니까 전주가 없어 대회가 유산되었다는 얘기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는 내가 일본에 유학하면서 평양과 경성을 왔다갔다했을 때인데 그때 들은 얘기로는 지나친 승부 때문에 대회가 깨졌다는 것이다.
즉 1929년의 제1회 대회 때는 원정 온 평양이 2승1무로 이겼으니까 말이 없었지만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대회 때는 평양이 1승2패로 지니까 별 말이 다 나돌았다.
『응원단이 일방적이다』 『경성군의 「플레이」가 거칠다』 『심판이 불공평하다』는 등이 패자의 변이었다.
이 말이 나올 정도로 그때의 플레이는 서로가 우악스럽고 거칠었다.
지금은 고의로 상대방을 차거나 때리면 관중들이 욕을 하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해야만 박수가 터져 나오고 인기가 있었다.
또 지금은 조금만 다쳐도 그라운드에 누워 엄살을 피우지만 그 때는 아무리 심하게 다치더라도 눕거나 아픈 표정을 하는 것을 오히려 창피로 알았다.
관중들과 선수들의 사고 방식이 이러했으니 게임에서는 언제나 폭발직전에까지 가는 우격다짐이 다반사처럼 일어났다.
경·평전의 1·2회 대회가 순조롭게 끝난 것 같아도 사실은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어느 한쪽에서는 다음 「게임」에 기권하겠다고 버티기가 일쑤였다.
그쯤 되면 주최측이 숙소를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 쫓아다니면서 화를 풀어주었고 그것도 끝내 안되면 「민족의 긍지」를 내세워 설득을 하기도 했다.
결국 경·평전은 이 같은 지나친 승부욕과 거치른 플레이 때문에 싸움이 하도 잦아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에 경·평전이 다시 시작된 것은 1933년의 4월이었다.
그 전해에 나는 일본 유학생 「팀」을 데리고 고국에 나왔다가 평양의 친구들로부터 평양축구단을 하루속히 만들자는 성화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친 1933년1월에 나는 평양으로 돌아와 우리 집에서 평양군의 결단식을 가졌다.
나는 졸업과 함께 평양 부청에 취직했는데 지금의 단장격인 총재에는 변호사인 최정묵씨를 추대하고 그때 이름을 최용순이라 했던 나도 감독 자리에 앉았다.
주장은 연전의 이정식, 선수는 일본에서 돌아온 김성우 (당시 숭전) 을 비롯해 김영근 (숭전) 박의현 (숭전) 장병오 (상업) 한영택 (상업) 윤창선 (관북중) 박인식 (보전) 정용수 (연전) 안수한 (상업) 김영찬 (숭전) 박영철 (일체전) 김신복 (숭전) 이정현 (숭전) 오용팔 (숭전) 김기덕 (숭전) 한용호 (회사원) 등 대부분이 무오단 선수가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3년 전에 경성군으로 뛰었던 박인식 (보전)과 일본 유학생인 박영철이 방학 때 평양으로 오면서 평양군에 소속키로 된 사실이다.
나는 이 평양군을 조직하기 전에도 재일본 조선 유학생 축구부 감독을 맡았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살려 평양 축구단은 기금이나 조직 면에서 확고히 했다.
즉 총재 밑에 고문격으로 김건영 이필상 이석찬 최능진 정동규 최응천 안석찬 차재일, 상담역으로 장수부 전성환 손치민 이덕인 안기섭 양동지 김광신 전기수 오신겸 조수증 등 평양의 돈 있고 유력한 유지들을 모두 끌어냈다.
또한 이정식이 주장이지만 팀을 운영하는데는 서기 노릇을 시켰고, 간사로는 박의현 한용호 장병오, 회계는 한영택을 맡겨 선수로 하여금 자치 제도를 실시케 하고 주로 나는 연습과 돈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경성군은 우리보다 2개월 뒤인 3월28일에 준비 위원회를 갖고 그 해 5월11일에 정식으로 창단 됐다.
이때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이영민 이용겸 이영선 등으로 후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경성군과 보전 출신의 김원겸이 중심이 된 경성군은 전주와 선수 진용이 약간씩 달랐다.
경성군은 이사장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인 여운형, 이사에 유억겸 이용설 배석환 현정주 김상익, 간사에 이영선 이창진, 감독은 현정주 이영민, 선수는 이혜봉 (연전) 정용수 (연전) 박석련 (연전) 이영민 (식은) 이창룡 (연전) 김용식 (보전) 백기주 (연전) 송기수 (송고교) 채금석 (경신 OB) 서형남 (세의전) 최성손 (경신 OB) 강영필 (연전) 한우량 (보전) 하영득 (보전) 이용겸 (세의전 OB) 유약한 (철도) 윤중호 (세의전 OB) 송기우 (보전 OB) 이종만 (연전 OB) 등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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