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 관람에도 정치 색만 내밀어|북적 대표들 창덕궁·경복궁 구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개운 찮은 뒷맛을 남기고 2차 본 회담을 마친 13일 하오 북한 적십자 대표·자문위원·수행원 일행은 우리측의 안내로 창덕궁과 경복궁 국립 박물관 등 운치 있고 유물이 풍부한 고궁을 둘러봤다. 이들은 관람 소감을 될수록 말하려하지 않았으나 열심히 구경했고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창덕궁>안내 설명 안 들어>
첫 나들이에 나선 북적 대표 일행은 예정보다 30분 늦은 13일 하오 3시50분 돈화문을 들어서 오세순 소장의 영접을 받은 뒤 이정선양 (30)의 안내로 창덕궁 약사와 약도를 기록한 현판 앞으로 안내되어 잠시 눈여겨보았다.
이들은 『이조 역대 왕이 정사를 펴오던 곳』이라는 인정전에 들어서자 비로소 관심을 갖고 모여들었다.
이양이 『인정전은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색인데 이는 만백성의 웃어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면서 두 손으로 왕이 백성을 굽어 보시는 「제스처」를 쓰자 모두 웃었고 특히 김태희 단장은 『당신 표현이 참 좋았다』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비원」이라고 쓴 누각에 들어서며 윤기복 자문위원은 뒷짐을 진 채 『창덕궁은 우리 인민의 고혈을 빨아서 부귀 영화를 누린 우리 조상의 잔재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쓰리다. 그러나 우리 인민의 창조적인 재능과 우수하고 우아한 건축술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고 장황하게 늘어놓고 『내가 말한 것을 신문에 쓸 수 있겠소』하고 엉뚱한 말을 했다.
남북적 대표단 일행이 부용지 앞 영화당 앞에 이르자 수행원들은 다투어 「카메라」로 주합루·부용지·부용정 등을 찍기에 바빴다.

<스카이웨이>길 가던 승려보고는 여름에 웬 두루마기>
13일 하오 4시30분 창덕궁 관람을 마친 북적 대표단 일행은 돈화문을 나서 창경원∼돈암동∼신흥사 입구∼아리랑 고개를 돌아 북악 「스카이웨이」로 향했다.
기자단이 탄 「버스」가 창경원 앞을 지날 때 북한측 사진 기자 최영철은 회색 승려복을 입고 가는 중을 보고 『여름에 웬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느냐』고 묻다가 승려라는 대답에 멀쑥했다가 『여자들은 조선옷이 있을 텐데 왜 양복 (양장) 을 입느냐』고 말머리를 돌렸다. 수행원과 기자들은 아리랑 고개 어귀와 정릉 골짜기 맞은편 언덕 등에 있는 허술한 집을 보고는 일제히 일어나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허술한 집 보자 일제히 셔터 눌러>
4시55분 팔각정에 도착한 일행은 2층에 마련된 24개의 「테이블」에서 맥주와 각종 가벼운 음료를 들며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기에 바빴다. 이때 팔각정 「홀」에서는 『이별의 부산 항구』등 노래가 흘러나왔다.
재일 조선 통신 사장 이형구는 중앙청을 가리키며 『해방 전에는 총독부 자리에서 남대문이 보였는데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서 잘 안보이겠다』고 말했다.

<높은 「아파트」에 수도 물이 나올까>
북한의 한 기자는 시내 곳곳에 서 있는 「아파트」를 바라보다가 『저 곳에 물이 어떻게 나오며 불이 날 경우 소방 도로가 없으니 곤란하겠다』고 엉뚱한 얘기를 꺼내다가 우리측 기자들이 「아파트」 안의 완벽한 수도 및 전기 시설 등을 설명하자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북적 대표의 홍일점인 이청일은 『저 많은 고층 건물에는 노동자가 살지 않고 사무실만 있더군요』라고 물어 안내양이 『일은 고층 건물에서 하고 일이 끝나면 조용히 집에 돌아가 쉰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한 기자는 『서울은 고층 「빌딩」이 밀집된 3·1로 부근만 좋구먼』하다가 『서울은 저녁놀이 지면 참 아름답겠다』며 시가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행원으로 따라온 석화는 혼자 떨어져 이곳 저곳을 구경 다니다가 다른 수행원이 『석 동무, 석 동무』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일행은 다음 「코스」인 경복궁으로 가는 길에 「아파트」마다 수없이 솟아있는「텔리비젼·안테나」를 보고는 『저게 가짜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일행이 하오 5시15분 인왕 「스카이웨이」로 들어섰을 때 청운동 「아파트」 앞에 5백여 주민들이 몰려 나왔으나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으며, 번잡한 사직동에 이르러서도 연도의 시민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버스」 안의 기자들도 입을 다물고 차창 밖을 조용히 내다보기만 했다.

<"중국 유물 같다" 고>경복궁 박물관
북적 대표단 일행은 13일 하오 5시25분 경복궁에 도착, 황수영 박물관장, 최순우 미술과장, 한병삼 고고 과장의 안내로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섰다.
윤기복 북적 자문위원은 다른 일행과 달리 자유스러운 태도를 보여 통일신라실을 관람하면서 『중국 유물 같다』고 질문했으나 한병삼 고고 과장이 『중국의 양식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창작한 우리 문화재』라고 설명하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
김일성 대학교 조선학 교수라는 강장수 북적 자문위원은 『시대와 종류별로 잘 진열됐다』고 옆 동료에게 속삭였고 우리측 기자들에게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물·유적을 성심껏 관리하여 후대에 선조들의 문화를 볼 수 있게 한 사학계·고고 민속학계 여러분들에게 사의를 표한다. 앞으로 다시 올 기회가 있으면 북한의 고고학자들도 와서 볼 수 있다면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학자다운 솔직한 의견을 털어놓기도 했다. 우리측 자문위원인 구범모 교수와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 위원과 함께 관람한 강은 『북한에는 이조시대 유물이 많진 않다』면서 이조 백자에 관심을 보였는데, 8세기 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 (높이 약 2m의 웃는 듯한 얼굴 조각과 거기에 나타난 섬세한 기교는 일품이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조 백자엔 관심>
이날 윤기복은 불교 공예실에서 위당 정인보 선생의 넷째 아들 정량모씨 (국립 박물관 미술관 학예 연구관)를 우리측 정희경 대표로부터 소개받았으나 간단한 악수만 나누었을 뿐 납북된 위당 선생의 소식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박물관장 황수영씨는 북적 대표단 일행의 관람 태도에 대해 『가장 유심히 본 것은 무령왕릉의 출토품들이었고 강서고분·중화군 벽화 등은 별로 반응이 없었다』고 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