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15번째 '설마'… 채동욱 정보유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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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제2대, 4대 국회의원으로 형법·형사소송법 제정을 주도한 효당(曉堂) 엄상섭(1907~60)은 1955년 당시 이승만 정권의 서민호 의원 사건 처리를 비판한 ‘서민호 사건과 설마’를 발표하였던 바, 설마가 사람을 잡을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효당의 혼(魂)이 살아온다면 무슨 말을 할지, 그의 글 틀을 빌려 지난 1년을 돌아보고자 한다.

 (1)대선 직전 국정원 직원이 선거 댓글 달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 첫 번째 설마요, (2)불과 닷새 만에 경찰이 “후보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중간 수사 발표를 한 것이 두 번째 설마요, (3)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서 수사과장이 돌연 다른 경찰서로 전보됨이 세 번째 설마요, (4)경찰 윗선에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 네 번째 설마요, (5)경찰이 국정원 직원 등 세 사람만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 다섯 번째 설마요,

 (6)전 국정원장 사법처리를 놓고 검찰 수사팀과 법무부가 2주간이나 갈등을 빚은 것이 여섯 번째 설마요, (7)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이라면서 불구속 기소에 멈춘 것이 일곱 번째 설마요, (8)뒤이어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이 여덟 번째 설마요, (9)국정원 수사 지휘하던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이 불거진 것이 아홉 번째 설마요, (10)법무장관이 느닷없이 총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한 것이 열 번째 설마요,

 (11)국정원 수사팀장이 수사 도중 전격 배제된 것이 열한 번째 설마요, (12)수사팀장과 서울중앙지검장이 국민들 앞에서 수사 외압 놓고 언쟁을 벌인 것이 열두 번째 설마요, (13)국정원 직원의 개인 변호사비를 국정원이 대준 사실이 드러남이 열세 번째 설마요, (14)선거 개입으로 의심되는 트위터 121만 건이 쏟아져 나온 것이 열네 번째 설마요, (15)전임 총장 의혹에 관한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과정에 청와대 행정관이 연루된 것이 열다섯 번째 설마이니, 이 모두를 어찌 우연이라 하리요.

 국가기관에서 하는 말은 사실이라 믿었던 시민들로서는 설마 하던 일들이 현실로 확인되는 상황이 유감스럽고, 기막힐 뿐이다. 그 숱한 설마 중에서 유독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설마는 열다섯 번째 설마라, 어이하여 초등학생 가족관계등록부까지 불법으로 들춰보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것이 총장 한 사람을 ‘찍어내기’ 위한 권력의 작용이었다면 더더욱 창피한 일 아닌가.

 일전에 한 검찰 간부의 설명인즉 “증거와 진술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가족부를 조회한 구청 국장이 누가 시켜서 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고비 고비마다 설마가 현실이 되고 마는 까닭은 조직 안에 있던 개개인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일 터. 정의감이든, 혼자 뒤집어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든, 더 이상 진실을 숨길 수 없는 시대임에 분명하다. 이제 구청 국장이 행정관 이름을 털어놓고 “고맙다는 문자메시지까지 받았다”고 하였으니, 그 배후의 얼굴이 궁금할 따름이다.

 한두 개의 설마로 끝날 수 있는 사안이었건만, 우리는 ‘설마…’ ‘설마…’만 내뱉다 한 해를 보내고 말았으니, 그 귀한 시간을 허송한 것이 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남의 허물로 나의 허물을 덮을 수 없고 오늘의 부끄러움으로 어제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는 법이거늘, 어찌 자기 허물을 탓하고 부끄러움을 토(吐)하는 자 보이지 않는가. 얼마나 더 많은 ‘설마’가 나와야 진실을 고백할 것인가.

 거리의 나목(裸木)들이 부끄러움을 아느냐고 묻고 있는 이때, 나 역시 효당의 뒤를 따라 ‘최후의 설마’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설마 이 정도까지 나온 의혹에 눈을 감을까? 효당의 마지막 문장대로 “설마 그럴 리(理)야 없겠지?”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