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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스탈린」의 죽음 (5)|소련과 6·25(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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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49년 3월 초순에 「크렘린」 당국자들은 북한과 중공 집권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이때 중공은 만주를 거의 휩쓸며 대륙 지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남한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그런대로 기틀을 굳히고 있었다. 소련으로 볼 때 중국 정세는 매우 유리하게 전환되고 있었지만, 한국의 사태 발전은 그 반대여서 전반적인 극동 전략의 조정과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수립 후 10월의 여·순 반란 사건, 11월의 대구 폭동 등을 비롯하여 북으로부터 수차에 걸쳐 무장 유격대를 남파했지만 그들이 기대한 내부 붕괴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공산 지하 무장 세력은 재기 불능의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1949년3월에 개최된 「모스크바」 3자 회담은 남한에 대한 본격적인 전면 무력 침공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다.

<무기 구입 내용 「한·소 협정」>
김일성은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국가 계획위원장 정준택, 상업상 장시우,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군부 대표 김일 등의 대표단을 인솔하고 「스티코프」 소련 대사의 안내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프라우다」 통신 보도에 따르면 「스탈린」도 직접 참석한 이 회담을 거쳐 3월17일에는 「조·소 경제 문화 협정」을 체결하고 이어 무기 구입을 주 내용으로 한 다음과 같은 군사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장비 면에서 북한의 전면 남침을 뒷받침해 주기 위한 것으로 이때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는 6·25의 계획표 작성에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①6개 보병 사단을 장비 할 수 있는 군사 장비와 무기를 추가 원조한다.
②3개 기계화 부대를 장비 하는데 충분한 무기와 시설을 추가 원조한다.
③7개 기동 보안대대의 장비를 제공하고 북한 공군 조종사의 훈련이 끝나는 대로 전투기 1백대, 폭격기 30대, 정찰기 20대를 원조한다.
④1백5명 내지 1백20명의 소련 군사 고문관을 1949년 5월1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 파견한다.
⑤1949년5월20일까지 10억원에 해당하는 각종 군수 물자를 북한에 반입한다.
이런 비밀 군사 협정이 조인된 다음날인 3월18일에 이번에는 「크렘린」 주재 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중 상호 방위 협정」이 체결되어 소·조·중 3자의 남침 계획은 완성을 보았다.
①어떤 제국주의 세력이든 북한 또는 중공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쌍방은 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동 전쟁에서 공동 행동을 취한다.
②중국 공산당은 1949년7월1일부터 8월31일까지의 기간 중 만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북한에 제공한다.
③북한은 만주에 있는 일본 기술자와 고용원, 그리고 남아 있는 일본 군수품 사용에 관하여 최우선권을 갖는다.
④북한과 중국 공산당은 쌍방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물물교환을 한다.
이러한 조약에 따라 소련을 정점으로 한 북한·중공 삼위일체의 남침 계획은 완료되었는데 소련이 실제로 북한에 제공한 장비는 보병 10개 사단 분의 각종 장비, 포 1천6백43문, 「탱크」 2백42대, 군용기 2백11대, 함정 30척이었다.
이만한 병력과 장비면 단숨에 남한을 휩쓸고 부산에 적기를 세울 수 있다고 「스탈린」과 김일성은 자신만만하였다. 그런데도 남침은 어디서부터 파탄이 생겼을까? 그 경위를 「흐루시초프」는 자신의 회고록 (Khrushchev Remembers) 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드디어 예정된 시각에 전쟁은 시작되어 성공적으로 침공이 개시되었다. 인민군은 재빨리 남으로 휩쓸고 내려갔다. 그러나 처음 몇 발의 총소리만 울리면 남한 안의 민중이 들고 일어나 이승만을 타도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장담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대로 인민군 부대가 진격해 내려가면 이승만 정권은 마침내 쓰러질 생각하였다. 그리고 또한 애초에는 이런 구상이 옳은 것으로 보였다.< p>

<지하 공산당 조직에 약점>
사실상 남한 정권은 안정되지 못했고 스스로 방위할 수도 없는데다가 저항도 미약했다. 이승만은 남한 안에서 그다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공산 세력이 내부 붕괴를 가져올 만큼 강력하지도 못했다. 당 조직의 기본 작업에 어떤 흠이 있는게 틀림없었다. 김일성은 남한에 지하 공산 조직이 깔려 있어 당에서 신호만 보내면 민중이 반정부 봉기를 일으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이런 봉기는 끝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인민군이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리고 인민 해방 전을 벌이고 있는 김일성이가 제발 성공해주기를 빌었다.
그것은 한 국민대 국민의 전쟁이 아니고 계급 전쟁이었다. 노동자·농민·「인털리겐차」 등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주의 원칙위에 서 있는 북한의 노동당 지휘 아래 한데 뭉쳐 자본주의자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군대가 부산 가까이 다다르면서 전력은 바닥이 나버리고 말았다. 전쟁을 끝내려면 남단의 항구인 이 도시를 장악해야만 했다. 만약 이 항도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더라면 한반도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적은 부산에서 이승만이 조직한 저항 세력을 활용하여 인천에 상륙 작전을 준비하였다.

<파국 오자 「스탈린」 태도 표면>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인민군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남한에 내려갔던 인민군은 사실상 모두가 기습 반격을 받아 퇴로가 끊겼고 갖고 간 무기는 대부분 한국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파국의 위협은 차츰 북한 전역에까지 미쳤다. 이렇게 인민군이 위기에 직면한 책임의 일부는 「스탈린」에게 있었고 이점에 있어 그는 규탄 받아야 할 것이다.
즉 「스탈린」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조치를 취하였다. 북한이 남침 준비를 한참 서두르고 있을 때 「스탈린」은 인민군 각 사단 연대에 배속되었던 소련 군사 고문단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해버렸다.
이에 대해 내가 질문을 던지자 「스탈린」은 이렇게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우리 고문단을 거기에 그냥 두는 건 너무 위험해. 잘못하다가는 포로로 잡힐 수도 있단 말이야. 이런 일에 우리가 끼여들었다는 증거를 보이고 싶지 않아. 그건 김일성의 일이지, 우리 일은 아니니까.』 이렇게 돼서 소련 고문단은 본국으로 소환돼온 것이다. 인천 상륙 후 인민군의 후퇴 작전이 시작되면서 나는 김일성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비극적 사태에 관한 보고를 듣고 몹시 마음이 상했다. 나는 김일성에게 동정이 간 나머지 「스탈린」에게 이렇게 말해보았다.
『「스탈린」 동무, 김일성에게 생색 있는 원조를 해 주는게 어떻습니까. 그는 군사 전략에 능하지도 않은데 이제 미군 정예 부대와 맞서 싸우는 형편입니다. 북한 주재 우리 대사가 김일성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그는 직업 장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소련 극동군 사령관 「말리노프스키」 원수를 북한에 보내서 작전을 돕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런 내 제의에 「스탈린」은 극히 냉담하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김일성에게 성공하라고 축복까지 해준 「스탈린」이었는데 왜 그럴까. 만일 김일성이 소련으로부터 「탱크」를 1개 군단분만 더 얻었더라면 남하 작전을 가속화시켜 부산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거기서 끝날 뻔했다. 인천에 상륙한 적군은 서울을 다시 빼앗고 38선을 넘어 진격해왔다.
이래서 사태는 김일성과 북한에 절망적으로 돼갔다. 한편 당시의 북한 공군은 그때로서는 최신형이며 기동성이 가장 강한 「미그」 15로 장비 되어 있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미군은 공군 장비를 개선하여 우리 편보다 속도가 빠르고 더 강력한 새 전투기를 도입해왔다.
「미그」 15는 압도되어 제공권은 완전히 적 손아귀에 들어갔다. 미군 기는 아무 거리낌없이 북한 전역을 폭격하였다. 북한은 그 이상 미 공군 공격으로부터 도시와 발전 시설을 보호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6·25 때 북한 주재 「폴란드」 대사관 무관으로 있다가 59년 서방 세계로 망명한 「파웰·모나트」 대령도 남침은 전적으로 소련 지휘하에 이루어졌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북한을 지배했던 소련 대사>

<북한의 사실상 지배자는 소련 대사였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인 1951년9월의 대사는 「블라디미르·a·라즈바에프」라는 육군 중장이었는데 그는 대사인 동시에 북한 주둔 군사 고문 단장이었다.
소련 대사관은 평양 북쪽의 어느 두메 마을에 자리잡은 토굴과 움막으로 되어 있었다. 이 두메 마을에서 8 「마일」 더 북쪽으로 가면 북한 공산군 총사령부를 구성하는 판자촌이 있었는데 이 인민군 사령부는 「라즈바에프」 대사가 인솔하는 소련 고문단의 통제하에 있었다.
김일성도 인민군 총사령부에 기거하면서 소련 군사 고문들 지시 하에 움직였다. 김일성은 소련 대사의 허가 없이는 어떤 결정을 짓거나 공식 성명을 발표할 수 없었다. 인민군의 모든 작명은 소련어로 초안되어 소련군 담당 장교의 서명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다. 소련 고급 고문 장교들은 남침 명령을 내린 것은 「스탈린」 자신이었다고 말하였다.
장성을 포함한 수명의 소련 고문 장교들이 남한 점령 실패의 책임을 지고 「모스크바」로 소환됐는데 실책은 그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문관들 말과 같이 군부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은 「모스크바」의 상전들, 특히 바로 「스탈린」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 주요일지 (1952년4월13·14·15·16일)
※13일 ▲「미그」 7대 격추, 4대에 손해 ▲휴전 감시위 회의, 50초에 끝나 기록 수립 ▲ 「맥아더」, 어떤 공직도 불 수락 언명
※14일 ▲휴전 감시위 회담 15초 ▲「밴플리트」 8군 사령관 취임 한돌
※15일 ▲공산군, 문산 서북방서 공세 ▲한미 회담 개최 ▲신익희 의장, 의원 소환 민중 대회 비난 담화
※16일 ▲휴전 회담 교착 계속 ▲미 육군, 새 「탱크」 개발 ▲소·중공 무역 협정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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